1961년 4월17일 0시, 쿠바 중서부 피그만(Bay of Pigs).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속의 수중침투조 7명이 수색을 마치고 ‘장애물이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수송선 4척에 분승한 중무장 병력 1,400여명이 해안으로 나아갔다. 한 시간 뒤, 공격 지점에 소형 상륙정을 탄 병력이 해안에 닿았다. 접안하려는 순간, 침공 병력을 운 좋게 발견한 쿠바군 순찰차량에서 발사한 총탄이 새벽의 정적을 찢었다. 무장 병력이 방어선을 넘기 전에 침공 소식은 무전을 타고 쿠바군에 퍼졌다.
탱크까지 동원한 침공군의 정체는 쿠바 민주혁명전선(Cuban Democratic Revolutionary Front).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에 반대해 미국에 망명한 쿠바인들로 조직된 저항세력이었다. 망명자들을 모아 무기를 주고 훈련 시킨 미국은 이들을 ‘2506 여단’이라고 불렀다(2506는 훈련 도중에 사망한 대원의 군번에서 따왔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로 CIA가 쿠바 망명객을 모집한 1960년 5월 최초의 지원자는 28명. 아이젠하워 정권은 특별예산 1,300만 달러를 편성해 군대를 키웠다. 쿠바 침공에 나설 무렵 인원은 1,334명. 보병 5개 대대와 공수 1개 대대로 불어났다.
쿠바 혁명 성공(1959년1월) 직후, 카스트로 정권을 승인했던 미국이 왜 전복을 기도했을까. 발단은 경제 전쟁에서 비롯됐다. 혁명 당시 쿠바는 미국의 경제식민지 상태. 공공사업의 80%, 전화·전기 분야의 92%, 공공철도의 절반, 사탕수수농장의 60%를 미국 자본이 소유했다. 미국의 비호 속에 1934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17년간 권력을 독점해온 바티스타 정권이 국내 정치는 탄압하고 각종 이권은 외국에 팔아넘긴 탓이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카스트로는 농장 개혁부터 손댔다.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의식해서다.
카스트로는 외국인 소유 농장을 국유화하되 만기 20년짜리 채권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혁명 4달 뒤 카스트로는 1차 토지개혁(5월)을 단행, 개인의 농지 소유 한도를 4㎢로 제한하고 외국인 소유를 금지시켰다. 농민들은 환호했으나 미국은 경악했다. 미국은 본토에서 불과 150여 ㎞ 떨어진 쿠바를 오래전부터 앞마당이라고 생각해온 터. 독립 직후에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훗날 6대 대통령)는 “쿠바는 중력의 법칙을 적용받아 스페인이라는 나무에서 떨어질 사과”라며 “반세기 안에 미국이 차지해야 할 섬”이라고 말했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 이후 4년간 쿠바를 점령한 미국은 문화와 자본을 심었다. 급속하게 미국 경제권으로 편입된 쿠바에서는 ‘진정한 독립’을 부르짖는 반란이 일어나 성공한 적도 있지만 고비마다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에 막혔다. 오랜 염원인 경제 자립을 추진하는 카스트로와 재산권을 지키고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미국은 사사건건 맞섰다. 결정적으로 카스트로가 1960년 2월 사탕수수를 소련에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받은 원유를 쿠바 내 미국계 정유회사에서 정제하려고 시도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미국계 회사들은 카스트로의 제의를 거부했다. 수십년 동안 누려온 원유 수입권과 정제권을 상실할 수 없다고 버티자 카스트로는 정유시설을 국유화했다. 냉전 체제 아래 미국과 패권 경쟁을 펼치던 소련은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사탕수수를 국제 가격보다 비싸게 사주고 원유는 낮은 가격에 공급해 쿠바의 환심을 샀다. 쿠바와 소련 관계가 가까워지자 퇴임 직전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61년 1월 쿠바와 외교관계를 끊었다. 아이젠하워에 이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케네디는 포괄적 경제 제재를 내리고 한 걸음 더 나갔다. ‘2506 여단’을 통한 군사 작전을 실행한 것이다.
배후에 미 해군 항공모함 에섹스호와 구축함 5척의 호위를 받는 침공군은 3개 지점에 상륙하고 C-46, C-54 수송기를 타고 공수작전까지 펼쳤으나 결과는 처절한 실패. 상륙에 성공한 병력도 재집결 장소가 넓은 늪지대여서 꼼짝달싹 못한 채 갇혀 상륙 3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114명이 전투에서 죽고 부상 360명을 포함,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다. 쿠바군은 176명 전사에 500여명 부상. 쿠바가 감췄을 뿐 실제 전사자가 2,000명 이상이라는 설도 있다. 미국인 희생자도 나왔다. B-26 경폭격기를 몰던 미군 조종사 4명과 CIA 소속 1명이 죽었다.
쿠바는 이 사건을 한껏 써먹었다. 카스트로 정권은 ‘조국을 침공한 미제의 앞잡이 명단’을 발표해 군중의 분노를 이끌어냈다.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했어도 공통점이 있었다. 농장주 100명, 저택을 가진 토지 소유자 67명, 공장주 35명, 사업가 112명, 유산으로 먹고 살던 무직자 194명, 바티스타 정권의 군인 194명 등으로 대부분 권력의 혜택을 보던 계층이었다. ‘침공군 명단’은 진위를 알 수 없어도 혁명 뒤의 혼란으로 불안해하던 쿠바인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단결하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아르헨티나의 의사 출신으로 카스트로의 혁명 동지이며 산업부 장관을 맡고 있던 체 게바라가 “침공군과 케네디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을까.
피그만 침공을 물리친 카스트로는 ‘미 제국주의가 남미에서 실패한 최초의 사례’라며 정권 홍보에 적극 활용했다. 경제적 이익도 얻었다. 미국이 쿠바인 포로에 대한 도의적 책임에 고민한다는 점을 알아채고는 1961년 9월 ‘미화 2,800만 달러에 해당하는 대형 트랙터 500대를 주면 포로들을 석방하겠다’는 제의를 내놓고 협상에 들어갔다. 지루한 협상 도중에 카스트로는 부상자와 병사 60명을 미리 석방하는 ‘아량’까지 베풀며 1962년 말 1,113명을 풀어줬다. 석방 대가로 애초 제시한 금액의 두 배에 가까운 5,300만 달러를 받았으니 카스트로는 꿩 먹고 알까지 먹은 셈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풀려난 쿠바인들을 미식축구 결승 경기장에 초청해 “쿠바에 자유가 다시 찾아오는 날 ‘2506 여단’ 깃발을 다시 휘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으나 55년이 지나는 오늘날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 피그만 침공 사건의 후유증은 미국 현대사에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을 뿐 아니라 지구촌을 핵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다. 미국과 사실상 전쟁을 치른 카스트로는 급격하게 좌경으로 기울어 사회주의 국가를 선언하고 소련과 더욱 가까워졌다. 소련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해달라는 요청도 보냈다. 1962년 10월 말과 11월 초 소련의 미사일 기지 설치를 둘러싼 ‘쿠바 미사일 위기’는 아직까지 ‘인류가 공멸했을 뻔한 최대 위기로 손꼽힌다.
미국과 극한 대립했던 소련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한발 물러났다. 핵전쟁의 초침도 가까스로 멈췄다. 피그만 침공은 한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 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은 쿠테타를 감행한 박정희 장군의 좌익 경력과 청년 장교단의 지나친 민족주의 경향을 우려했으나 피그만 침공 실패를 뒤처리하느라 개입할 정신이 없었다. 쿠바 진공 작전 실패의 후유증을 겪던 케네디는 6월 초 비엔나 미소 정상회담 준비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곧 이어 8월에는 독일 문제가 터졌다. 동독이 베를린 장벽 건설을 시작한 것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고 나서야 한 숨 돌린 케네디 대통령은 피그만 침공 사건에 대해 ‘내가 왜 바보 같은 짓을 했는가’라며 뉘우쳤다고 한다. 피그만 침공 사실을 미리 알고 보도하려던 뉴욕 타임스에 국가 이익을 앞세워 보도를 막았던 점도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어빙 제니스(1918~1990)는 케네디의 침공 작전 실패 원인을 ‘집단 사고(集團思考)’ 탓이라고 진단한다. 1972년 출간한 ‘집단사고의 희생자(Victims of Groupthink)’를 통해 그는 암암리에 강요된 일사불란하게 내려진 결정에 의구심을 표하지 못하며 외부 정보를 차단하는 집단은 망하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제니스는 집단사고가 ‘외부 견해를 차단할 수 있을 만큼 응집력 강한 집단이나 강력하고 역동적인 지도자가 있는 집단에서 자주 나타난다’고 봤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월남전 확전,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피그만 침공사건을 앞둔 케네디 대통령의 실패는 잘못된 정보에서 잉태됐다. 2만5,000명 쿠바군과 20만 민병대를 허수아비로 여겼고 일단 침공군이 진주하면 쿠바 민중이 거국적으로 봉기할 것이라고 믿었다. 결과는 정반대였으나 케네디의 참모 누구 하나도 이런 잘못된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물론 참모집단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순탄하게 자라고 하바드대 출신이 대부분인데다 자기 의무를 다해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어서 다른 목소리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피그만 침공 사건 56주년. 지구본을 반 바퀴 돌려 한국을 본다. 우리에게 집단사고가 없었을까. 현직 대통령으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집단사고의 틀에 갇힌 대표적 사례다. 대통령이 홀로 말씀하면 장관들은 고개를 파묻고 받아 적기 바쁜 국무회의 분위기가 집단사고의 전형이 아니면 무엇이랴. 지도자가 홀로 모든 것을 다 챙기는 만기친람(萬機親覽)과 불통, 맹종 속에 탄핵이라는 불행이 싹텄다. 연일 전쟁설이 도는 한반도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내일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집단사고에서 벗어나면 종북으로 몰아 부치는 구태가 여전하다.
제니스는 집단사고에서 벗어나 집단지성(集團知性)이 발휘될 수 있는 조건으로 공정한 토론과 비판을 수용하는 지도자, 집단의 소집단화, 외부 전문가 초빙으로 꼽는다. 심지어 최소한 한 사람에게는 ‘반대를 위한 반대’ 역할까지 맡기라고 충고한다. 요컨데 여러모로 생각하고 폭넓게 들으라는 얘기다. 국민의 민의를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지도자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뽑혔으면 좋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