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고광본 선임기자의 관점] 기득권·소극행정에 20년째 제자리...허가받은 기기 현장서 무용지물

■ 원격의료 끝내 좌초하나

고령화시대 노인 의료비 절감

의료사각지대 해소에 필요한데

서비스산업 혁신 전략서 또 제외

日 로봇 활용한 원격수술 허용

中은 온라인 병원만 160개 달해

의료서비스 개선·혁신성장 위해

정부·정치권 리더십 발휘해야







심장부정맥으로 2개월마다 정읍아산병원에서 심장약을 처방받는 전북 고창의 허선영(81)씨. 6개월에 한 번은 심전도와 X레이 검사를 하고 두 번은 의사가 3분가량 문진만 하는데 병원에 갈 때마다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집에서 2㎞인 면 소재지로 나와 다시 15㎞가량 떨어진 병원까지 가는 버스를 탄 뒤 내려서 한참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릎도 많이 아픈데, 심전도와 X레이 검사를 안 할 때는 스마트폰 화상통화로 진료를 받고 약도 배달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피검사도 지난해부터 하지 않고 체온은 집에서 스스로 잴 수 있으니 굳이 매번 병원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 벽지에 사는 당뇨·고혈압 등 만성질환자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장애인들이 이런 애로를 많이 호소한다. 원양어선이나 군부대·교도소 등도 의료 사각지대로 꼽힌다.

원격의료가 허용되면 환자의 의료 접근성과 편의성이 좋아지고 정확하게 약을 먹는 복약순응도도 높아진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의료기기 등 헬스케어 산업 발전에 따른 창업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 예상된다. 고령시대 노인 의료비가 폭증하는 현실에서 의료비 절감 효과도 기대된다.


미국·캐나다·호주는 물론 일본과 중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도 원격의료를 허용하며 환자 편의성을 높이고 미래 성장동력을 확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의 경우 땅이 넓어 병원 접근이 쉽지 않고 의료비도 비싸 원격의료가 지난 1990년대부터 확산됐다. 농촌이나 대도시 외곽지역 등의 심혈관·뇌졸중·만성질환 환자를 중심으로 허용한다. 지금은 원격의료로 진단·처방 이후 약도 집으로 배달받을 수 있다. 섬이 많고 노인 의료비 지출로 골머리를 앓는 일본은 2015년부터 낙도나 산간지역, 만성질환자 등에게 원격의료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로봇을 활용한 원격수술까지 허용했다. 중국은 병원에서 인터넷으로 진료·처방할 수 있는 ‘온라인 병원’이 160여개에 달한다. 동남아에서는 스마트폰 화상통화로 진료·처방을 받고 약 구입·배달이 가능한 애플리케이션이 인기를 끈다.

하지만 정부가 26일 발표한 보건·의료, 관광, 물류, 콘텐츠 등 서비스 산업 혁신전략에서 원격의료는 찾아볼 수 없다. 정부의 중점추진과제에서 빠진 것이다. 정부가 벽지·오지, 군부대, 원양어선,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폭넓게 원격의료를 허용하기 위해 2016년 의료법 개정안을 제출하고 앞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활발히 시범사업을 펼치던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3월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올해 업무추진계획에서 ‘도서·벽지, 원양선박, 교도소, 군부대 등 의료 사각지대에 제한적으로 스마트진료(원격의료)를 허용한다’는 의료법 개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질적인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현행 의료법은 환자와 의료진 간 원격 진단과 처방을 금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은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기기가 50종이 넘지만 건강정보를 병원에 전송만 할 뿐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논의가 시작된 지 20년째를 맞아 올해 5세대(5G) 통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고 헬스케어 기술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원격의료는 걸음마도 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최근 각 당 원내대표에게 “원격의료는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시행하고 있으며 신산업 육성과 의료 서비스의 질 개선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촉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적 편익이 크니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달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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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청와대나 정부, 여야 정치권 모두 원격의료에 팔을 걷어붙일 생각은 거의 없다.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개인병원 등 의료계의 조직적 반발을 우려해서다. 민주노총과 시민단체도 원격의료가 의료영리화의 전 단계가 될 수 있다며 색안경을 끼고 본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한국공학한림원·대한민국의학한림원도 신문사에서 원격의료 포럼 공동개최 등을 제안하면 손사래부터 친다.

물론 의료계의 반대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환자가 의료정보를 잘못 입력해 오진의 우려가 있을 수 있고 개인정보가 누출될 염려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중국 등에 비해 의료 접근성이 좋은데 굳이 원격의료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도 한다. 정부가 1차 병원 중심으로 원격의료를 하겠다고 누차 밝혔지만 3차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몰려 1·2차 병원과 지방병원이 몰락할 것이라는 주장도 내놓는다.

병원 의사가 보건소에 나온 만성질환자를 대상으로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전라남도병원 의사가 보건소에 나온 만성질환자를 대상으로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전라남도


스마트폰으로 원격진료를 받아 약까지 배달받는 것을 형상화한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스마트폰으로 원격진료를 받아 약까지 배달받는 것을 형상화한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원격의료가 표류하는 사이 추진 대상과 범위는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앞서 정부는 2013년 말 원격의료 입법예고 이후 의료계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2016년 대상을 넓게 정해 의료법 개정안을 제시했다. 도서·벽지 주민은 물론 만성질환자, 정신질환자, 수술·퇴원 후 관리가 필요한 환자,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인,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 등이 포함됐다. 주기적 대면진료를 전제로 원격 진단과 처방도 허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2017년 수정안에서는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의료’로 이름을 바꾸고 대상도 일부 축소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대상은 더 줄었다. 당정청은 지난해 군부대, 원양어선, 교정시설, 의료인이 없는 도서벽지의 환자에만 허용하기로 했다. 만성질환자와 거동이 불편한 노인·장애인 등이 제외되면서 2016년 안과 비교하면 대상 환자가 128만명에서 8만명으로 급감했다. 이철희 중앙대새병원건립추진단장은 지난달 재단법인 여시재 토론회에서 “중국 인터넷 병원 가입자가 1억8,000만명을 돌파했고 이제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가 중국에 가서 같이하자고 했다. 국내에서 (원격의료가) 안 되니 중국에 붙어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고 털어놓았다. kbgo@sedaily.com

고광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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