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The Rise of Cirque du Soleil 태양의 서커스 개막

태양의 서커스 창단자 기 랄리베르테와 그의 거리 공연단 이야기

Interview by Dinah Eng

기 랄리베르테 Guy Laliberte(52)는 캐나다 퀘벡에서 입에서 불을 뿜고 (마지막 사진 참조) 죽마(竹馬)를 타는 곡예사로 시작해 거리 축제를 조직했다. 그리고 10억 달러에 가까운 매출을올리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 '태양의 서커스 Cirque du Soleil'를 통해 전 세계에 화려한 예술곡예 공연을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을 소개한다.


내 첫 번째 꿈은 여행이었다. 나는 다른 나라와 다른 피부색, 이채로운 음식에 마음이 끌렸다. 지난 1977년 18세였던 나는 아코디언을 들고 떠난 유럽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의 즐거움을 발견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나는 의사나 변호사가 되라는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유럽에서 돌아와 대학에 가지 않고 창작 감독 겸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말씀드렸을 때 부모님(블랑딘과 가스통 랄리베르테 Blandine and Gaston Laliberté)은 눈물을 많이 쏟으셨다.

극단에서 죽마를 타는 거리 예술가였던 나는 퀘벡에서 거리 공연 축제를 시작했다. 그때까진 거리 공연가를 불러 샌드위치 하나만 사먹이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자에 던져진 돈을 각자 관리하며 가진 돈을 관리하는 법을 차츰 배워나갔다.

지난 1984년, 캐나다 정부가 자크 카르티에 Jacques Cartier의 캐나다 발견 4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문화 예산을 책정했다. 정부는 우리 거리 공연가들에게 주 전역에서 펼쳐질 경축행사를 위한 예술 콘셉트를 구상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만의 독특한 서커스를 탄생시키는 일은 당시 우리의 꿈이었다. 그래서 내가 책임을 맡아 감독 직을 수행했다. 정부와 첫 번째 계약을 100만 달러에 체결할 수 있었다. 그건 보조금이 아니라 계약금이었다.

우리의 첫 순회 공연은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파랗고 노란 대형 서커스 천막에서 열렸다. 그리고 태양의 서커스란 뜻의 시르크뒤솔레이 Cirque du Soleil는 그해 여름 흥행에 성공했다. 재충전을 위한 시간이 필요할 때 나는 바닷가로 나가 일몰을 바라본다. '태양'이라는 아이디어는 하와이 해변에서 착안했다. 태양은 젊음과 에너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정부 계약 행사는 1년짜리였지만 우리에겐 많은 것을 배우고 꿈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준 기회였다.

초기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모든 일을 했다. 텐트를 세우는 일을 돕고, 마케팅을 담당했으며, 예술 감독 역할을 했다. 공중 그네, 죽마 타기, 광대 쇼, 곡예 등을 포함한 우리 공연은 약10막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입에서 불을 뿜었다. 가스프 Gaspe에서 첫 공연을 연 이후에 우리는 퀘벡에서 15개 도시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몬트리올에 도착했을 때쯤엔 노하우가 꽤 생겼다. 순회 공연이 끝날 무렵 나는 우리가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사업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겨울 동안 캐나다를 떠날 수 있는지 여부였다. 반년짜리 순회 공연으로는회사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85년 보조금을 받기 위해 정부와 다시 협상을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막대한 부채를 지고 말았다. 나는 2주 동안 판매사들와 협상했고, 은행원 스무 명을 만났다. 우리에겐 첫 번째 공연으로 얻은 서커스 천막이 있었지만, 은행은 실패할 경우 그 천막을 갖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그때 퀘벡에서 찾은 지방은행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대출 한도액을 35만 달러 늘려주는 행운이 찾아왔다.

그 후 우리는 로스앤젤레스 예술 축제 Los Angeles Festival of the Arts 조감독 토마스 슈마허 Thomas Schumacher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나는 우리가 개막 무대를 장식할 수 있다면 초청에 응하겠다고 말했다. 실베스터 스탤론, 아놀드 슈워제네거 같은 유명인사와 여러 영향력 있는 인물들, 콜럼비아 픽처스의 간부들이 공연장을 메웠다.

그들이 우리 공연을 좋아하기만 한다면 미국에서 순회 공연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커스 천막을 팔아 모두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우리는 1987년부터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이듬해 우리는 산타모니카와 뉴욕 공연을 통해 수백만 달러 이익을 냈다. 작은 가족 기업에서 국제적 성격의 중견기업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1989년부터 보조금을 받지 않게 되었다.당시 최악의 난제는 일부 직원의 의구심을 해소하는 일이었다. 나는 도전으로 먹고 살지만, 애정과 지지 또한 필요로 한다. 나는 거리 출신의 예술가 단체를 운영 중이었다. 나는 벌어들인 돈을 재투자해 새로운 공연 제작을 즉시 시작하고 순회 공연의 종류를 두 가지로 늘려 확실한 성장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이 방안을 제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당시 하고 있던 고된 공연을 통해 곧바로 이익을 얻는 쪽을 선호했다. 장기적인 성공을 위해선 새 공연에 지속적으로 재투자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순회 공연을 1년 하느냐 오래 하느냐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일부는 떠났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남았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 1990년 런던과 파리에서 공연하며 유럽 순회를 시작했다. 이후엔 일본 공연도 열었다. 당시 우리는 평균가격이 23달러인 티켓을 12만 장 팔았다. 우리의 순회 공연을 본 (할리우드 관계자) 스티브 윈 Steve Wynn이 그때 우리를 불렀다. 1992년 당시 라스베이거스는 공연 차원에선 미개발 지역이었다. 라이브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지는 런던과 뉴욕이었다. 그 후엔 엔터테인먼트 공연이 카지노 고객 서비스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첫 사업을 시작하며 시저스 팰리스 Caesars Palace와 손잡았다. 공연이 너무 난해하다고 생각한 이들은 마지막에 손을 뗐다. 스티브는 미라쥬 리조트 Mirage Resorts에서 상연하길 원했다. 그렇게 때로는 실패가 최고의 성공이 되기도 한다. 공연 첫해 점유율 92%를 기록하며 480회 공연된 미스테르 Mystère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우리는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며 알레그리아 Alegría, 살팀방코 Saltimbanco, 오 O 등으로 공연 종류와 횟수를 늘렸다. 나는 우리의 성공을 활용해 세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 2007년 수질 문제 해결을 위해 사재 1억 달러를 약정하고 원 드롭 재단 One Drop Foundation이란 단체를 설립했다. 2009년에는 태양의 서커스 25주년 기념 행사를 열었다. 지난 2010년 우리는 티켓을 1,000만 장 이상 팔았는데, 티켓의 평균 가격은 75달러였다.

현재 '태양의 서커스'에는 전 세계 57개국을 대표하는 5,000여 명의 직원이 있다. 경기불황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잘나간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상연되는 일곱 개 공연의 티켓을 할인해 가격을 다시 책정했다. 태양의 서커스는 보증이나 대형 부채 문제가 없는 현금 흐름 위주의 회사다. 다양한 시장에 맞춰 여러가지 공연을 개발했다. 달러가 약세인 현재 유럽에서 큰 매출을 올리고 있다.

나는 늘 혼자서 공연 자금을 마련해 왔다. 그렇다면 상장을 통해 사세를 늘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나 은행을 위한 로드쇼는 할 수 없을 듯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기업을 세웠으니까.


번역 이하나 hana.erica.lee@gmail.com
자료 출처: 태양의 서커스 Cirque du Soleil; photograph (left): Richard Termine
PHotograph: Ryan Enn Hughes—New York Times/redux; 그래프 출처: 미국 자영업연맹 (NF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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