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장은 토종 국내 기업과 코리아법인을 둔 외국계 기업들의 각축장이다. 외국계 기업이 장악한 시장이 있는 반면, 잘나가는 글로벌 기업이 고전하는 시장도 공존한다. 심지어 진출하자마자 철수를 단행하는 외국계 기업도 있다. 그렇다면 왜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 한국 법인들은 국내 시장에서 죽을 쑤고 있는 걸까? 포춘코리아가 그 속사정을 자세히 들여다 봤다.
이권진 기자 goenergy@hk.co.kr
한국 시장에서 사실상 일보 후퇴를 선언한 순간이었다. 정철종 모토로라 모빌리티 코리아 사장은 말했다. “아직 국내는 LTE 커버리지가 넓지 않습니다. 데이터 요금도 현실적이지 못한 수준이죠. 3G 모델을 먼저 출시하는 게 소비자에게 더 이득이 된다고 판단해 4G LTE폰을 제외했습니다.” 지난 2011년 10월 신제품 모토로라 레이저 스마트폰을 출시하면서 정철종 사장이 던진 말이다. 반면 미국 을 포함한 해외 시장에서 4G와 3G를 모두 적용한 모토로라 레이저 모델을 선보였다. 한국 시장에서만 4G 폰 출시를 포기한 셈이다.
정철종 사장은 한국 시장을 거꾸로 읽고 있었다. 지난 2011년 하반기는 이동통신 3사가 4G LTE 전국망 조성에 올인하던 시기였다.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애플 등 글로벌 휴대폰 제조사들이 앞다퉈 신제품 출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토로라는 떠오르는 한국 4G 시장에서 따끈따끈한 신제품 출시를 망설였다. 모토로라의 결정에 경쟁사는 물론 시장도 궁금증을 드러냈다.
하지만 모토로라코리아의 결정을 주도한 건 정작 모토로라 본사가 아니었다. 모토로라의 뒤에는 구글이 있었다. 구글은 지난 2011 년 5월 엄청난 적자에 신음하던 모토로라를 125억 달러(약 13조 5,000억 원)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붓고 인수합병했다. 구글은 당장 수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급성장하는 한국 4G 시장에 공격적으로 대응해야만 했다. 하지만 구글은 반대로 한국 시장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모토로라코리아 사장의 입을 통해 구글은 한국시장에서의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구글의 칼춤과 모토로라의 철수
“저희도 언론보도를 통해 철수 소식을 알았습니다. 직원들 모두 어리둥절한 상황이죠.” 익명을 요구한 모토로라코리아 관계자의 말이다. 모토로라는 지난 12월 한국 시장 철수를 언론에 전격 발표했다. 한국 내 휴대폰 사업을 2013년 2월까지 철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모토로라코리아의 이번 발표는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 이후 한국 시장에 대한 첫 공식 입장이었다. 모토로라의 대변인은 설명했다. “전 세계적으로 R&D 조직을 재편하고 있다.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시장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변화는 우리의 이런 계획을 반영한 것이다.”
모토로라코리아의 철수는 내부 임원 몇몇만 아는 일급비밀로 진행됐다. 대부분 코리아법인 철수 절차가 그렇듯이, 글로벌 본사 관계자와 한국법인 헤드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내부 직원들도 철수 진행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토로라코리아는 한국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었다. 1% 수준의 낮은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익 측면에선 그럭저럭 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 2011년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전년 대비 각각 67%, 37% 감소한 25억 원과 59억 원을 기록했지만 최소한 적자는 내지 않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모토로라 관계자는 말한다. “2012년 들어서면서 내부적으로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심리가 부쩍 높아졌습니다. 구글과 모토로라의 시너지를 은근히 바란 거죠.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됐어요.” 구글은 글로벌 모토로라의 수익성 개선을 위해 2012년 8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모토로라의 직원 4,000여 명을 단계적으로 감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전 직원의 20%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 구글은 또 전 세계 94개 모토로라 사무소의 30%가량을 폐쇄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글의 무서운 칼춤이 시작된 셈이었다.
“한국은 모토로라의 R&D센터와 디자인센터가 모두 있는 곳입니다. 글로벌 사업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하는 조직체계가 갖춰 있었단 얘기죠. 전 세계를 어디를 뒤져봐도 해외법인에 두 조직을 갖 춘 곳은 한 손에 꼽을 정도죠. 때문에 구글에서 글로벌 1차 구조조정을 발표할 때만 해도 모토로라 한국 법인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까 달랐던 겁니다. 구글이 한국 시장을 실패한 시장으로 판단한 거죠.” 모토로라 관계자의 증언이다.
사실 구글 입장에선 모토로라의 해외 시장 전략 따위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할 당시만 해도 해외 전문가들 사이에선 두 가지 시나리오가 돌고 있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구글이 모토로라의 하드웨어 경쟁력을 발판으로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구글 TV의 상용화에 올인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그동안 모토로라가 보유해 온 특허 1만 7,000여 개를 바탕으로 기존 사업 부문을 하나씩 쪼개서 매각할 것 이라는 예상이었다. 지금까지의 과정만 보면 두 번째 시나리오가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구글이 그동안 모토로라의 특허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모토로라는 구글에 합병된 이후에도 최근까지 적자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 2012년 3분기 모토로라의 영업적자는 전년 동기 대비 126.2% 증가한 약 5억2,700만 달러였다. 구글의 입장에선 결코 반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글은 최근 모토로라의 중국, 브라질 공장을 매각한다고 밝혔다. 돈이 되는 사업부문을 분리·매각해야 할 정도로 사업이 악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익명의 관계자는 덧붙인다. “이번 한국 철수 과정에서 국내 연구 인력 10%를 글로벌 지사에서 흡수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아직 글로벌 휴대폰 사업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한국 직원들이 얼마나 지원할지 저도 알 수 없어요. 한국 시장에서 모토로라에게 가장 실망한 사람들이 코리아 법인 직원들 아닐까요.” 24년 전 한국 시장에 진출한 모토로라는 그동안 스타텍, 레이저 등의 모델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겨왔다. 하지만 구글이 인수한 모토로라는 제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고 한국 시장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전 세계를 어디를 뒤져봐도 해외법인에 두 조직을 갖춘 곳은 한 손에 꼽을 정도죠. 때문에 구글에서 글로벌 1차 구조조정을 발표할 때만 해도 모토로라 한국 법인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
추격자로 전락하는 애플
모토로라가 한국을 떠나면, 외국산 휴대폰 업체는 애플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된다. 스마트폰 세계 시장에서 선전하는 대만의 HTC도 지난 2012년 7월 국내 사업을 철수시켰다. 한때나마 블랙베리 스마트폰으로 직장인들 사이에서 히트를 쳤던 림(RIM)도 같은 해 3월 캐나다 본사가 아예 스마트폰 사업을 접자 자연히 국내 영업도 자취를 감췄다. 소니와 노키아도 한국에 들어온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토종 전자회사들이 장악한 국내 휴대폰 시장에서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외국 플레이어는 애플 하나뿐이란 얘기다.
하지만 스마트폰 열풍의 주역이었던 애플도 요즘 그 영향력이 전성기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2년 11월 중국 최대 일간지 인민일보는 애플의 최근 동향을 이렇게 분석했다. “잡스는 7인치 태블릿PC 시장 등을 쫓아가는 것을 줄곧 반대했다. 하지만 팀 쿡은 삼성전자 제품의 반응이 좋자 이를 따라 아이패드 미니를 출시했다. 시장의 반응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애플은 삼성전자가 최근 7인치 갤럭시탭과 5.5인치 갤럭시노트 2로 큰 재미를 보자, 서둘러 7.9인치 아이패드를 출시했다. 하지만 기존 9.7인치 아이패드를 단순히 7.9인치로 다운사이징 한 것이라며 결국 ‘그 밥에 그 나물’이란 평가를 받았다. 인민일보는 잡스에서 쿡으로 애플의 경영 체제가 넘어간 것을 두고도 “선도자의 이미지가 추격자의 이미지로 변질된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애플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시장에 아이폰 5를 한창 출시하고 있다. 아이폰 5는 잡스가 떠난 뒤 팀 쿡이 주도해 만든 첫 번째 아이폰으로 불린다. 팀 쿡 아이폰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어떨까? 아직 시판 중인 제품이라 단정하기엔 이르지만 마니아 층을 제외하곤 예전만큼 반응이 뜨겁지 못하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IT컨설팅 업체의 한 대표는 말한다. “과거 잡스가 1~2개의 혁신적인 제품을 출시했다면 쿡은 기존과 변화가 없는 여러 개의 제품을 시장에 공급하는 방식을 쓰고 있습니다. 거기서 차이가 나타나는 거죠.”
팀 쿡의 경영방식은 단기 실적에선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런 방식은 아이폰의 마니아 층까지 돌아서게 할 공산이 커 보인다. 앞서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말한다. “소비자들은 애플이 주는 무형의 가치를 제품과 함께 구매했어요. 그런데 그런 프리미엄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폰도 그저 평범한 스마트폰으로 둔갑하게 되는 겁니다.” 최근 몇 년간 기록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삼성전자는 애플을 매출면에서 1.5배 가까이 앞서고 있다. 삼성의 대표적인 스마트폰 모델인 갤럭시 시리즈의 브랜드 파워는 아이폰을 능가할 정도로 수직 상승 중이다. 애플은 그 존재만으로 혁신가와 시장 선도자의 의미를 담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였다. 하지만 그것도 잡스가 경영하던 시절 애플의 이미지였다.
애플 시대의 종언은 트렌드에 민감한 한국 시장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지난 2012년 10월 도미니크 오 애플코리아 사장이 전격 경질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장으로 임명된 지 불과 1년 여 만의 일이었다. 애플의 아이폰 5 출시를 코앞에 두고 벌어진 일이라 애플을 눈여겨본 사람들은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익명을 요구한 IT컨설팅 업체 대표는 말한다. “본사 쪽에 갑작스럽게 계약 해지를 알려온 걸로 압니다. 당사자인 애플코리아 사장은 물론 내부 관계자들도 모두 당황한 눈치더군요.”
도미니크 오 사장은 2011년 초반까지 LG전자 MC사업본부에서 일한 모바일 전문가다. LG전자의 유럽지역 마케팅과 상품기획을 담당했다. 한국인 출신으로 국내 시장에 정통하고 글로벌 경험까지 두루 갖춰 애플코리아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 적임자로 평가 받아왔다. 그렇다면 오 사장을 쫓아낸 결정적인 이유는 뭘까? 익명을 요구 한 IT컨설팅 업체 대표는 말한다. “아이폰 4S의 영업 실책 때문이라 고 봅니다. 최근 1년간 한국 시장에서 애플의 아이폰 4S는 삼성전자 의 갤럭시2나 LG전자의 옵티머스 LTE와 뜨거운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죠. 하지만 결과는 애플의 참패였습니다. 그 책임을 오 사장이 지고 물러난 거라 판단됩니다.” 해외 시장에서 아이폰 4S의 성적표는 한국 시장과 사뭇 달랐다. 잡스의 유작이라는 프리미엄 효과를 등에 업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익명의 컨설팅 대표는 덧붙인다. “한국 시장에서의 성패는 애플에게 자존심 문제로 귀결됩니다. 최근 삼성전자와 애플 간 특허소송은 제품 경쟁보다 경영진의 미묘한 신경전 양상을 띠고 있잖아요. 한국 시장 실적 부진에 민감할 수밖 에 없는 이유죠.”
한국 시장에서 추격자 신세가 된 애플의 심기는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팀 쿡 사장은 지난 12월 미국 경제주간지 블룸버그 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애플은 삼성전자와 복잡한 관계에 있다. 삶은 때때로 복잡한 것이다. 삼성과의 관계는 사실 거북스럽다.” 최근 특허소송과 관련해서 팀 쿡은 “많은 시도 끝에 내린 선택이었다”며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결국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보게 될 것”이라고 삼성전자를 몰아붙였다. 사실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소송은 예견된 일이었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경쟁을 연구하고 있는 제임스 올워스 하버드경영대 연구원은 최근 한 칼럼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실제 (삼성전자의) 위협은 디자인 모방이 아니라, 애플이 부품 등을 삼성전자에 아웃소싱 하면서 다양한 경영 노하우가 전수되어 규모의 경제까지 이룰 수 있게 도와준 점이다.”
애플은 오래전부터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자사 제품을 생산해 왔다. 애플은 아이폰 핵심 부품을 삼성전자 공장에서 생산한다. 삼성전자는 애플의 제품 관리를 비롯해 제조, 판매 등의 핵심 노하우를 아웃소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힐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꾸준히 애플을 닮으려 노력해왔고 결국 애플을 넘어서 버렸다. 이제 애플은 국내외 모든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추격해야 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 법인이 만나는 한국 시장의 장벽
익명을 요구한 외국계 SI업체 관계자는 증언한다. “삼성 계열사 SI(Systems integrator)와 관련한 입찰 PT에 들어가보면 관행적으로 삼성SDS 직원 한두 명이 심사석 쪽에 앉아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삼성SDS는 삼성의 SI전문 계열사입니다. 당연히 입찰을 낸 다른 삼성 계열사가 갑이 되고 삼성SDS는 을이 되는 거죠. 그리고 저희 같은 회사는 병의 위치에서 PT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는 덧붙인다. “이러한 관행은 삼성에만 있는 게 아니죠. 국내 SI 업체가 100% 이렇게 돌아가고 있어요. LG그룹은 LG CNS, SK그룹은 SK C&C 가 도맡고 있는 실정이죠. 다른 대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같은 외국계 SI업체는 이들 대기업의 SI 계열사와 친분을 가져야 겨우 물량을 따낼 수 있는 상황이죠. 해외에선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진풍경입니다.”
한국은 재벌이 거의 모든 산업을 좌지우지한다. SI산업은 재벌의 내부거래 비중이 가장 높은 산업 가운데 하나로 분류된다. 국내 대기업 집단은 거의 모두 SI 계열사 하나쯤을 설립해 그룹 내의 물량 을 한곳으로 집중시킨다. 대부분 수의계약 방식으로 거래처가 선정되기 때문에 이런 내부거래가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선 세계 시장 에서 아무리 잘나가는 외국계 SI업체라도 프로젝트 수주를 따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외국계 SI업체 관계자가 설명을 이어갔다. “SI업종은 내부거래 금액 가운데 95%를 수의계약으로 진행해 SI 계열사에게 일감을 몰아줍니다. 저희가 일을 따내려면 이들 SI 계열사들이 요청해 오는 자료조사를 거의 서비스 차원에서 해줘야 하죠. 그렇게 신뢰를 쌓아야 간간이 물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 일어 나는 일이죠.” SI산업에서 외국계 기업들은 한국 기업과 경쟁하기 보단 시장의 보이지 않는 장벽과 씨름해야 한다는 의미다. 국내 금융 시장에서도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금융당국의 지나친 규제에 볼멘소리가 높다. 익명을 요구한 외국계 금융기관 관계자는 설명한다. “해외 시장과 달리 한국 시장은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강조합니다. 또 그걸 법으로 규제하고 있어요. 심지어 금융당국이 사회공헌 활동을 관리 감독을 하고 있습니 다. 해외에선 찾아보기 드문 일이죠.” 어떻게 보면 한국 금융당국의 권한은 외국보다 막강해 보일 수도 있다. 국내에서 영업하는 금융 기관이라면 금융당국이 규정한 수수료 및 금리 체계를 준수해야 한다. 자율적인 경영활동 부분까지 금융당국이 간섭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목이다.
외국계 금융기관을 위한 정부정책도 나오고 있지만 그 내용이 미흡해 오히려 외면받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북아 금융 허브를 위한 서울 여의도 금융중심지 사업이다. 2012년 완공된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는 외국 금융사 유치를 위해 사무실 3 개 동과 특급호텔 등을 마련했지만, 1개 동만 입주가 진행됐을 뿐 나머지 동은 썰렁한 상황이다. 외국계 은행의 한 관계자는 “여의도가 빌딩 밀집지역이라 세제감면 혜택까지 없기 때문에 입주할 이유를 거의 찾을 수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외국계 금융사를 유치해 서울을 글로벌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야심 찬 정책도 결국 실패에 가까워지는 분위기다. 최근 들어 골드만삭스자산운용, 아비바생명, 홍콩상하이은행 등 외국계 금융사들이 줄줄이 사업철수를 결정하면서, 한국 금융 시장의 전체 외형이 쪼그라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금융사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외국계 금융사의 엑소더스는 대부분 본사 차원에서 이뤄진 결정입니다. 본사의 경영환경이 악화되니까 해외 법인들을 철수시켜 여유 자본을 확보 하려는 거죠. 하지만 현재 국내 금융권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간 시기라, 외국계 금융사의 탈한국 현상이 혹여 불에 기름을 끼 얹는 게 아닐까 조금은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글로벌기업의 한국 법인이 국내 시장에서 고전하는 이유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애플처럼 시장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고군분투하는 경우도 있고, 모토로라나 외국계 금융사처럼 본사 차원의 경영 변화로 하루 아침에 정리되는 사례도 있다. 또 한국 시장의 보이지 않는 견고한 장벽 때문에 쓴맛을 보고 있는 한국 법인들도 한둘이 아니다. 이들의 경영 사례를 보면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 역으로 참고할 수 있을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