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은 서경배 회장의 할머니인 고(故)윤독정 여사가 1930년대에 개성에서 운영했던 ‘창성상점’에 연원을 두고있다. 윤독정 여사가 팔던 상품은 동백기름이었다. 당시 동백기름은 여성들이 머리손질을 할 때 마지막으로 곱게 윤기를 내는 머릿기름으로 널리쓰였다. 동백기름을 머릿기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기도 했다.
윤 여사는 ‘품질’을 최우선시했다. 최고의 품질을 위해서는 최고의 원료를 써야만 한다는 일념에서 좋은 동백나무 열매를 얻기 위해서라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창성상점이 있던 곳은 개성이었다. 개성은 고려시대부터 이른바 개성상인(송상으로도 불림)의 거점으로 유명한 ‘상인들의 도시’였다. 개성상인은 상도(商道)를 매우 중시했다. 그들의 상도는 의(義), 신(信), 실(實)이라는 삼도훈(三道訓)으로 요약될 수 있다. 윤 여사 역시 개성상인의 한 전형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사업을 거들었던 고(故)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는 자연스레 개성상인의 정신을 체득했다.
서성환 창업자는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징용을 당해 중국으로 끌려갔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에도 그는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몇 달간 중국에 머물렀다. 그는 거대한 중국 대륙에서 드넓은 세계에 대한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 남창동에서 ‘ 태평양화학공업사(현 아모레퍼시픽)’라는 상호를 내걸고 새로운 출발에 나섰다. 그 상호에는 태평양을 넘어 세계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서려 있었다.
서성환 창업자는 1948년 한국 최초로 상표를 붙인 화장품을 세상에 선보였다. ‘메로디 크림’이었다. 이 제품은 서성환 창업자가 독자적으로 사업을 펼친 이후 처음 출시한 브랜드 화장품이었다. 우리나라 상표법이 처음 제정된 1949년보다 1년 앞선 일이었다. 당연히 한국 최초의 브랜드 화장품이었다. 서성환 창업자는 국내 화장품 업계에 브랜드 개념을 도입한 선구자였던 셈이다.
그는 광복 이후 모든 물자가 부족하고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시대에 ‘품질제일주의’를 표방했다. 대충대충 날림으로 제조한 상품들이 넘쳐나던 때에 고집스레 품질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신념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개성상인의 상도를 더욱더 굳건하게 지켜나갔다.
창업 당시부터 ‘품질제일주의’ 추구
서성환 창업자는 국내 화장품 업계에서 ‘최초’ 기록을 줄곧 써 내려갔다. 1951년에는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신제품을 내놓았다. 한국 최초의 식물성 포마드 제품인 ‘ABC 포마드’가 바로 그것이었다. ‘ABC 포마드’는 식물성 원료인 피마자유를 사용해 기존 광물성 포마드의 단점이었던 뻣뻣하고 번들거리는 현상을 해소함으로써 남성 고객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또 1954년 한국 최초의 화장품 연구실을 설립했다. 공장 한쪽을 개조해 만든 두 평 남짓한 작은 연구실이었지만 당시 화장품 업계 현실을 감안하면 매우 혁신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역시 서성환 창업자의 품질제일주의 경영철학이 오롯이 배어난 사례다.
한상훈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장은 말한다. “서성환 선대 회장은 ‘기술이 있어야 고객들에게 최고 품질의 제품을 제공할 수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1950년 대에 일찌감치 연구실을 세웠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연구개발 투자를 아끼지 않은 창업자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오면서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게 됐습니다. 연구개발 역량은 하루아침에 구축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성과가 축적돼야만 확보할 수 있는 겁니다.”
1960년 서성환 창업자는 프랑스 화장품 기업의 초청을 받아 국내 화장품 업계 인사로는 최초로 해외 시찰을 떠났다. 세계 뷰티 산업의 중심지이자 선진 시장인 프랑스를 둘러보고 돌아온 그는 회사의 경쟁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방문 2년 뒤인 1964년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 현대식 설비를 갖춘 공장을 준공했다. 국내 화장품 업계 최초로 대량생산 설비를 제대로 갖춘 당시로서는 최신식 공장이었다. 영등포 공장의 본격 가동 이후 수많은 브랜드 제품이 속속 세상에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성환 창업자는 1964년 국내 최초로 국산 화장품 수출에 성공했다. 1962년 출시한 ‘오스카’ 브랜드 화장품 20여종을 에티오피아에 수출한 것이다. 오늘날 글로벌 뷰티 기업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아모레퍼시픽의 해외 시장 진출의 첫 걸음이었다. 1966년에는 세계 최초의 한방 화장품인 ‘ABC 인삼크림’을 출시하면서 ‘세계 최초 기록’을 썼다.
서성환 창업자는 화장품 유통 시장에도 일대 혁명을 가져온 주역이었다. 그는 1964년 새로운 유통 채널인 ‘방문판매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방문판매 전용 브랜드 개발, 시장 전체를 촘촘하게 연결하는 체인점 네트워크 구축과 확장, 우수 판매사원 확보 및 교육 등의 핵심 정책이 체계적으로 뒤따랐다.
서성환 창업자는 1989년 차남인 서경배 현 아모레퍼시픽 회장을 회사에 불러들였다. 고된 경영수업의 시작이었다. 서성환 창업자는 젊은 아들에게 쉽지 않은 일을 계속 맡겼다. 대견한 것은 차남이 군말하지 않고 일을 척척 해낸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 당시 태평양그룹은 사업 다각화의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경영상태가 전반적으로 악화되던 어느 날 서성환 창업자는 차남을 불러 심중에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할 것이다.” 차남은 답했다. “그 생각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화장품에 집중할 겁니다.”
2세 시대에 글로벌 기업의꿈 결실
이날 이후 태평양그룹은 여러 분야에 걸쳐 방만하게 운영되던 사업들을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사업 구조조정이 펼쳐졌다. 그 주역은 바로 서경배 회장이었다. 1997년 서성환 창업자는 드디어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곧이어 서경배 회장이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서경배 회장은 대표이사 취임 후 ‘ 선택과 집중’ 을 경영전략의 큰 골간으로 삼았다. 아모레퍼시픽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미(美)’와 ‘건강’ 분야에 사업 역량을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서경배 회장은 2002년 ‘태평양’이라는 회사명을 ‘아모레퍼시픽’ 으로 바꿨다. 글로벌 기업으로 본격 도약하기 위한 승부수가 새로운 회사명에 스며 있었다. 그는 회사의 정체성과 비전 수립을 위한 고민도 거듭했다.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모든 임직원이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마침내 그는 2006년 아모레퍼시픽의 소명이자 정체성을 ‘ 아시안 뷰티 크리에이터( Asian Beauty Creator)’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또 2013년에는 국내외 고객들에게 ‘ 아시안 뷰티’ 의 가치를 전함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원대한 기업(Great Global BrCompany)’으로 나아가겠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창립 70주년 기념일에 즈음해 이렇게 말했다. “올해 아모레퍼시픽은 70년의 뜻 깊은 역사를 갖게 되었지만,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아모레퍼시픽의 원대한 꿈은 이제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아모레퍼시픽만이 지닌 독창성에 자부심을 갖고 이를 창의적으로 잘 살려낸다면, 반드시 ‘아시안 뷰티’로 세계 뷰티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