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저녁 서울 역삼동의 스타트업 지원 공간인 디캠프(D.CAMP)에 정보기술(IT) 개발자 수십명이 모였다. 이들은 특정 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개발자들이다. 좀처럼 모이지 않고 목소리도 내지 않는 프리랜서 개발자들이 디캠프에서 3시간 이상을 함께 한 이유는 '협동조합' 설립을 위한 토론회 때문이었다.
개발자들이 협동조합을 구상하는 이유는 조금도 거창하지 않다. 토론회를 주최한 개발자 커뮤니티 OKJSP의 노상범 대표는 협동조합이 '가격 후려치기' 없이 발주사로부터 일감을 수주해 조합원들에게 분배하고 들어온 대금은 24시간 이내에 조합원에게 입금되는 체계를 구축하고 싶어했다. 또 야근ㆍ주말 근무수당 등이 명기된 '표준계약서'를 작성하는 규정도 꼭 필요하다고 봤다. 이들은 더 이상적인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발자 잔혹사'를 조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 모인 셈이다.
곳곳에서 창조경제를 외치고 있지만 개발자들의 현실은 실제로 이렇다. '갑을'은 고사하고 '병정무기'까지 이어지는 하도급 구조 속에서 빠듯한 보수를 받으면서도 갑의 눈 밖에 날까 조심스러운 게 개발자들이다. 우리나라에서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기업이 탄생할 수 없는 이유는 이렇게도 명백하다.
토론회 참석자들이 협동조합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조금씩 달랐지만 이 같은 현실이 장기적으로 개발자 개개인과 국내 IT 산업을 갉아먹을 것이라는 의견은 일치했다. 토론회에서 만난 박우범 위시켓 최고운영책임자(COO)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창업까지 이어간 사례다. 위시켓은 발주사와 개발자가 입찰 시스템으로 만나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온라인 아웃소싱 서비스를 추구하고 있다. 개발자 협동조합과 방식은 다르지만 목표는 비슷한 셈이다.
이처럼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 변화가 '자력갱생'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는 정부와 기업이 주목해야 한다. 창조경제를 국가적 사명으로 내세운 나라에서 정작 개발자들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방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