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돼온 글로벌 통화완화 공조체제가 6년 만에 붕괴될 조짐이 뚜렷해지면서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멀티트랙(Multi Track)' 시대가 열리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상대적으로 호조를 보이는 경기 회복세에 힘입어 기준금리 인상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반면 중국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일본·캐나다 등은 경기방어를 위해 양적완화 정책 도입이나 지속 등을 검토하고 있다.
23일(현지시간)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전날부터 미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사흘간 열리는 잭슨홀 회동은 주요국 중앙은행장들의 '비둘기'적 목소리로 뒤덮였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온도차가 드러났다. 일부 국가가 조만간 '마이웨이'를 선언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22일 연설에서 시장의 예상대로 비둘기적 신호를 내놓으며 기준금리를 조기에 인상하지 않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옐런 의장은 "실업률 하락으로 전반적인 노동시장 상황이 개선된 것처럼 과장돼 있다"며 "여러 관련 지표로 볼 때 노동시장에 상당한 불확실성이 남아 있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힌트는 내놓지 않았지만 당분간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겠다는 뜻을 또 한번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연준의 금리인상 결정은 고용이나 물가 등 추가 경기지표에 달려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옐런 의장은 "미 노동시장이 예상보다 빨리 개선되면 기준금리 인상 시점도 현재 예상보다 앞당겨지고 속도도 더 빨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바클레이스의 마이클 가펜 미국 경제 분석가는 "옐런의 기본적인 경기판단이 바뀌지 않았지만 연준 정책의 무게가 갈수록 금리인상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도 완연하다"고 말했다.
반면 유로존·일본 등은 통화완화 정책을 더 확대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23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연준처럼 양적완화 조치를 도입할 수 있음을 거듭 시사했다. 그는 "유로존 경기 회복세가 계속 취약한 상황"이라며 "역내 실업률 하락과 수요증가를 위해 추가 경기부양에 나설 채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도이체방크AG의 앨런 러스킨 주요10개국(G10) 담당 통화전략가는 "미 통화정책은 내년 중 긴축으로 선회하는 반면 유럽은 오는 2017년까지도 완화정책을 유지할 것"이라며 "미국과 ECB 간 기준금리 경로가 달라지는 등 통화정책의 멀티트랙 시대가 열리면 외환시장 불안정성도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도 이날 당분간 공격적인 통화부양책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기존의 자산매입 프로그램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디플레이션 극복을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며 "물가 상승률이 목표치인 2%에 이르기 전까지는 경기순응적인 통화정책을 지속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캐피털이코노믹스는 최근 "4월 소비세 인상에 따른 경기위축으로 일본은행이 자산매입 규모를 더 늘릴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캐나다 중앙은행의 스티븐 폴로즈 총재 역시 잭슨홀 회동에서 행한 인터뷰에서 "노동시장의 개선 여지가 너무 많고 경기 불확실성이 크다"며 최근 부동산 버블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중국 역시 8월 들어 신규 대출, 제조업, 소비 등의 지표가 예상 밖으로 둔화하면서 일각에서는 2년 만에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인프라 건설 등 기존의 미니 부양책으로는 경기둔화를 방어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바클레이스는 최근 "지방정부 부채 부담, 수요증가, 금융 리스크 등의 해소를 위해 중국 인민은행이 올 하반기에 금리를 두 번 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모하메드 엘에리언 전 핌코 최고경영자(CEO)는 "옐런은 경기 가속기에서 얼마나 빨리 발을 떼느냐는 문제에 직면한 반면 드라기는 얼마나 많이, 언제 밟느냐가 관건"이라며 "중앙은행들이 더 이상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멀티스피드 국면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