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18일 오전7시 일본 도쿄 도요스의 한 영화관에서 열린 벤처기업 설명회에 약 400명의 대기업과 금융회사 직원들이 모여들었다. 회계법인 도마쓰 주관으로 지난 2013년 1월부터 매주 열리는 이 설명회는 출자나 사업제휴를 원하는 벤처기업들이 대기업이나 금융사들을 상대로 사업계획을 설명하는 자리다. 요미우리신문 영자지 재팬뉴스에 따르면 지난 2년 동안 이 행사를 통해 성사된 계약은 약 100건에 달한다. 사이토 유마 도마쓰 사업개발부문 이사는 "'아베노믹스'로 자금조달 환경이 개선된 덕에 벤처기업들이 모처럼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고 말했다.
장기 불황으로 위축돼 있던 일본의 산업 생태계가 지지부진했던 벤처투자가 급증하고 창업도 활발해지고 있다. 해외로 공장을 옮겨 일본 내 산업 공동화를 초래했던 대기업들도 하나둘 국내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비상장 벤처기업의 자금 조달액은 1,000억엔(9,133억원)을 넘어서며 6년 만에 최고 수준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정책금융공고의 벤처기업 융자는 2013년 전년 대비 36% 늘어난 1,821억엔으로 10년 만에 최대 규모로 늘어난 데 이어 2014회계연도 상반기(2014.4~9월)에는 1,076억엔을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127%나 급증했다. 융자기업 수도 전년 동기 대비 118% 증가했다.
일본 내 창업 열기가 살아나기 시작한 데는 스마트폰 등 신기술 보급에 따라 세계적으로 창업이 늘어난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베노믹스' 성공을 위해 성장동력 육성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아베 신조 정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엔저를 유도하며 대기업들의 실적개선을 이끈 아베 정권은 올해 법인세 인하와 규제개혁, 공적연금(GPIF)의 주식투자 확대 등 일련의 친기업 정책으로 기업 살리기에 한층 힘을 실을 계획이다. 특히 민간 차원의 혁신이 필수인 성장전략을 실현시키기 위해 벤처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였다.
9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경제산업성이 국내외 벤처캐피털(VC) 및 펀드들과 손잡고 벤처기업들에 사업자금뿐 아니라 해외 신규 거래처 개척까지 지원해주는 '이스라엘' 식 지원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아베 정부는 지난해 말에도 벤처기업에 투자한 개인 투자가에게 세제를 우대하는 '엔젤 세제'를 확대하기로 하는 등 아베노믹스 마지막 관문인 '성장전략'의 일환으로 벤처기업 지원책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엔저 덕에 자금 사정이 넉넉해진 대기업들도 벤처기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실적호조에 힘입어 사업확대를 꾀하는 대기업들이 신기술을 갖춘 신생기업과의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벤처 투자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또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유동성이 대거 풀리면서 증시가 호황을 누리고 있는 점도 신생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지난해 일본 내 신규 상장기업은 77개로 7년 만에 가장 많았으며 올해는 그 수가 90~100개에 달할 것으로 시장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이 중에는 시가총액 수조엔 단위의 대기업들도 있지만 정보기술(IT) 분야를 중심으로 하는 소형주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올해도 IT 분야의 벤처기업 상장이 줄을 이을 것으로 증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아베 정부가 발 벗고 나선 기업 생태계 구축 작업은 신생기업 육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해외로 빠져나간 대형 제조업체들의 생산기지를 일본 국내로 되돌려놓기 시작했다. 일본 1위 가전업체인 파나소닉은 중국에서 생산해온 세탁기·에어컨 등 백색가전 40여개 품목을 올봄부터 국내 생산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전자기기 제조업체 샤프도 국외에서 일본으로 역수입해온 TV·냉장고 등 가전제품 생산 라인을 일본에 갖출 계획이다. 혼다는 베트남에서 생산하던 배기량 50cc 이하의 소형 이륜차를 올해부터 일본에서 생산한다. 캐논도 앞으로 2년 내에 현재 40% 수준인 국내 생산 비중을 50%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일본 제조 대기업들의 '유턴'은 한때 달러당 70엔대까지 치솟았던 엔화가치가 아베노믹스로 달러당 120엔 안팎까지 떨어지면서 가시화하고 있다. 파나소닉의 경우 해외생산 비중이 높은 탓에 엔화 가치가 달러당 1엔 하락하면 가전 부문에서 연간 18억엔의 이익이 줄어든다. 게다가 신흥국 임금이 올라 저임금 메리트가 떨어진 점도 국내 복귀에 영향을 미쳤다. 2000년 당시 40배 정도 차이 나던 중국과 일본 간 임금 격차는 2013년 6배로 크게 좁혀진 상태다.
기업들의 국내 복귀에 아베 정권의 직접적인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 12월8일 총선을 앞두고 도요타자동차의 본산인 아이치현 도요타시에서 지원유세에 나선 아베 총리는 "민주당 정권 시절에 도요타는 적자로 세금도 못 낼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5,000억엔의 세금을 내고 있다. 아베노믹스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베노믹스가 기업들을 살린 만큼 이제는 기업들이 일본 경제 살리기에 적극 호응해야 한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말이다. /신경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