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과 지독한 거짓말, 그리고 통계.’ 누가 얘기했을까.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인용구 사전을 뒤져보면 영국의 소설가이자 정치가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남겼다는 해석이 주류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디즈레일리의 어록”이라고 소개한 뒤부터 굳어졌다는 설과 영국의 경제 저널리스트로 명저 ‘롬바르드 스트리트’를 통해 현대적 중앙은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월터 배젓이 처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통계를 신뢰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디즈레일리는 숫자에 밝았다. 의원 시절이나 영국 총리로 재임할 때나 세세한 통계를 통째로 암기해 질의하거나 답변하는 데 써먹어 상대를 질리게 만들었다. 유대인 태생인 그가 핏줄의 핸디캡을 딛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두 가지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달리 비상한 두뇌와 치밀한 준비.
다른 하나는 돈이다. 1804년 12월 21일 작가이며 역사연구가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재산과 12살 되던 해 부친의 성공회로의 개종 덕에 여느 유대인과 달리 명문 고교를 나오고 해외여행도 마음껏 다녔다. 그와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상인으로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지참금을 주식에 투자해 성공한 인물. 디즈레일리가 소설을 쓰고 스무살 나이에 일간신문 창간을 추진하며 7번 도전 끝에 하원의원에 당선(34세)할 수 있었던 것도 집안의 재력 덕분이다.
디즈레일리 자신도 35세에 12살 연상인 돈 많은 과부와의 결혼을 통해 신문 창간 실패 당시 떠안은 채무를 덜었다. 돈을 노린 것 아니냐는 의심 때문에 2년 넘게 갖은 시험을 넘어 결혼한 디즈레일리 부부는 서로 아끼며 해로했으나 자식은 얻지 못했다. (디즈레일리가 61세에 혼외정사로 딸을 낳았다는 주장이 최근 나왔다.)
가정사가 남달랐던 탓인지 그는 정치에 매달렸다. 특징은 분쟁. 어떤 싸움도 마다치 않았다. 번번이 당론에 반대하는 사조직을 이끌며 세를 불린 끝에 두 차례(1868, 1874~80) 수상에 지명된 뒤 보수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자유무역을 강요하고 영국의 이권 극대화에 전력한 인물로 꼽힌다. 러시아와 오스만 튀르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하는 ‘그레이트 게임’을 이끌고 이집트 점령, 줄루 전쟁 등을 통해 아프리카 진출의 고삐를 조이었다.
러시아와 유럽 각국이 평화를 모색한 베를린 회의에서는 ‘외교 언어=프랑스어’라는 국제적 통례를 깨고 영어로만 연설하고 대화해 비스마르크로부터 ‘저 늙은 유대인만이 진짜 사내며 애국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남편 앨버트공과 사별하고 윈저궁에 10년간 칩거하던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까지 겸하게 만들며 국정에 복귀시킨 장본인도 디즈레일리다. 영국의 상징으로서 왕실의 존재가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
‘유대인이면서도 가장 영국적인 총리’, ‘제국주의자’로 불리는 디즈레일리를 뒷받침한 것은 유대 자본. 프랑스 외교관 출신인 러셉스가 프랑스 자본으로 건설한 수에즈 운하의 이집트 총독 지분이 나온다는 첩보에 따라 400만 파운드의 인수 자금을 유대계 국제자본인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빌려 순식간에 사들인 일화가 유명하다. 담보를 묻는 로스차일드에 ‘담보는 대영제국’이라고 대답했던 디즈레일리는 아직까지 ‘유일한 유대인 출신 영국 수상’이라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유대인 핏줄이 일부 섞인 영국 수상은 없지 않았으나 개종 이전의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영국 총리는 디즈레일리 뿐이다. 누구도 가지 않았고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길을 걸었던 디즈레일리의 삶은 유대인의 과거와 미래가 압축적으로 녹아있다. 디즈레일리의 조상은 역사상 최초(1516년)로 설정된 게토(유대인 구역)인 베네치아 게토 출신. 생전 디즈레일리의 회고에 따르면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령(1492년) 당시 베네치아로 쫓겨났던 조상들이 지중해 무역의 쇠퇴로 기회를 찾아 영국으로 이주해 디즈레일리 가문을 이뤘다.
1881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디즈레일리는 유대인으로 지낸 어린 시절 12년을 제외한 65년을 ‘지독한 영국인’으로 살았지만 누구보다 이스라엘 건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시오니즘 운동이 영국에서 공감대를 얻은 데에는 디즈레일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지독하게 싸움을 좋아하는 이스라엘의 성향도 디즈레일리를 닮았다.
영국의 하원의원, 재무장관, 수상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그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름(Disraeli)에서 앞뒤로 한자씩 d와 i만 빼면 ‘이스라엘’이니까. 선택해준 신에 대한 각골난망(刻骨難忘)인지, 나라를 잃은 각골통한(刻骨痛恨) 때문인지 정체성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눈물겹고도 무섭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