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3월12일] 명재상 비테


[오늘의 경제소사/3월12일] 명재상 비테 권홍우 편집위원 1905년 가을 도쿄. 시내 전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러일전쟁 보고대회에서 시위대로 돌변한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다. 국민적 축제로 기획된 승전보고대회가 왜 성토장이 됐을까. 이 사람 때문이다.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 러시아 재무장관 출신 비테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기세를 종전협상에서 꺾은 인물. 협상을 주선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은근히 일본 편을 들던 상황에서 비테는 미국 기자들은 물론 마차의 마부와 식당 종업원에게도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언론의 지지를 얻었다. 러시아에 대한 동정적 여론이 일자 루스벨트는 일본에 양보를 종용하고 나섰다. 결국 배상금 12억엔을 요구했던 일본은 한푼도 받지 못한 채 포츠머스조약을 맺었다. 10년 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받아낸 배상금으로 공업을 진작하고 금본위제도까지 도입했던 기억이 선명했던 일본인들로서는 뼈아팠지만 러시아는 한숨을 돌렸다. 역사상 최고의 협상가로 손꼽히는 비테는 러시아가 배출한 명재상으로도 기억된다. 독일계 부친과 러시아 전통귀족 출신인 모친 사이에서 1849년에 태어나 차별 속에서도 1892년 교통장관을 거쳐 재무장관에 올라 13년간 재임하며 외자유치와 보호무역정책ㆍ금본위제도 등을 시행하며 시베리아 철도를 개통했다. 친구인 화학자 멘델레예프를 표준도량국장에 임명해 미터법도 받아들였다. 러일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장관직에서 쫓겨났던 비테는 종전협상 대표로 임명돼 절체절명의 러시아를 구했으나 의원직 외에는 중책을 맡지 못했다. 공업화에 반대하던 토지 귀족들의 견제 탓이다. 비테는 1915년 3월12일 실의 속에서 사망(64세)했으나 그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오늘날 러시아의 지향점이 비테의 꿈과 동일하다. ‘공업 기술력을 갖춘 강대국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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