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를 흔든 남성 영웅들의 이야기 '적벽대전'이 오페라 연출가의 손을 거쳐 창극으로 재탄생한다. 국립창극단의 2015∼2016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 개막작 창극 '적벽가'를 통해서다. 적벽가는 중국 소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적벽대전을 소재로 동리(桐里) 신재효씨가 재구성해 만든 판소리다.
한국 1호 여성 오페라 연출가이기도 한 이소영(사진) 전 국립오페라단 단장이 연출을 맡아 31일 서울 장충동에서 창극 '적벽가'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영웅담으로 가득했던 '삼국지연의'와 달리 판소리 '적벽가'는 영웅들의 쟁패 뒤편으로 처참하게 스러져가야 했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더했다"며 "이번 공연에서도 아군과 적군이 싸우는 장면이 아닌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으로 끝나는지를 보여주고 소리의 여운과 생각의 확장을 이끌어내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판소리의 다섯 바탕 중 하나인 '적벽가'는 고음이 많고 풍부한 성량이 필요해 가창의 난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 때문에 국립창극단도 창단 후 50여년 동안 단 세 차례만 '적벽가'를 무대에 올렸다. 이 연출이 '판소리 다섯 바탕 중 하나의 창극을 연출해달라'는 창극단의 제안에 굳이 어렵다는 '적벽가'로 화답한 이유는 단 하나. '소리' 때문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이자 이번 작품에 작창·도창으로 참여한 송순섭 명창의 적벽가 완창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어요. 창극화할 때 소리를 일절 훼손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극대화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번 창극에서는 유비·관우·장비·제갈공명·조조 같은 원작 속 영웅보다 백성과 군사·여인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는 적벽강 한가운데 가라앉은 난파선에서 되살아난 망자들이 살육의 역사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연출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자 더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역사이기에 이를 기억하고 되새기려 한다"며 "원혼을 불러내 그들의 증언을 들음으로써 '위로해줄 사람'이 아닌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필요한 지금의 대한민국에 깊은 울림을 주고 싶다"고 전했다.
소리를 한껏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음악적 실험도 시도한다. 피리·아쟁·양금·소리북 등의 국악기와 피아노·콘트라베이스·팀파니 등의 양악기가 어우러진 음악팀은 창자의 노랫가락을 따라가는 수성(隨聲) 반주가 아닌 우주의 소리, 자연의 소리 등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선율을 선사할 계획이다. 오는 9월15~1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