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간단하다. 『은행에 직접 갈 일이 없다』는 것.HSBC 정도의 대규모 은행과 거래하는 고객들이라면 자동입출금기를 찾아 거리를 헤맬 필요도 없다. 런던 시내를 그물처럼 촘촘한 망으로 연결한 지하철 역에는 HSBC, 바클레이즈, 넷웨스트, 로이드 등 대형 은행의 자동입출금기가 2~3개씩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점포 내에 직원 수는 별로 많지 않다. 한산한 대고객 창구는 몇몇 직원들이 고객과 상담을 하거나 전화를 받고 있는 정도다. 번호표를 받은 수십명의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국내 은행 점포들과 비교하면 빈 집이나 다름없을 정도다.
그만큼 금융 선진국에는 폰뱅킹과 PC뱅킹, 무인점포시스템 등 전자금융의 활용도가 높다. 은행 고객들은 현금이 떨어지면 오다가다 지하철 역의 자동입출금기로 돈을 뽑으면 되고, 세금이나 공과금 납부는 모두 자동이체로 끝낸다. 웬만한 금융 상담도 전화나 인터넷으로 받으면 되고, 계좌 잔액은 은행이 꼬박꼬박 통지해주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증권거래도 집이나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해결하면 된다.
이처럼 홈뱅킹(HOME BANKING)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자, 이 부문을 취급하는 자회사를 별도 설립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독일 코메르츠방크의 경우 지난 95년 직접금융(DIRECT BANKING) 자회사인 콤다이렉트은행(COMDIRECT BANK)를 설립, 소매금융 업무의 교두보로 키워나가고 있다. 이 은행 거래고객의 43%가 은행 거래를 위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등 인터넷 뱅킹은 이제 코메르츠방크의 고객 서비스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부턴 인터넷 뱅킹에 신용카드 관리나 증권 매매 서비스 등을 부가, 그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도이체방크는 한발 더 나아가 온라인과 폰뱅킹을 취급하는 전자금융 자회사 「방크 24」에 점포망을 포함한 전반적인 리테일뱅크 기능을 이양한 「도이체방크 24」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HSBC는 홈 뱅킹의 영역을 한층 확대, 영국 최초로 TV뱅킹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 TV뱅킹은 디지털 TV와 전화선을 연결, 마루의 안락한 소파에 앉아 리모콘으로 금융상품을 사고, 잔고를 확인하고, 금융 상담·공과금 납부·자금이체까지 할 수 있는 서비스다. 화면을 보면서 리모콘을 조작하기 때문에 TV를 보는 기분으로 복잡한 은행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전자금융을 이용하는 고객이 많아질수록 은행 입장에서는 단순 거래에 매달리는 창구 직원을 줄이는 대신 전문 상담원 등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직원들의 비중을 높일 수 있어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게 된다. 고객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간편한 금융 거래를 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셈이 된다.
도이체방크의 경우 지난 96년만해도 20만명을 조금 웃돌던 온라인 거래고객 수가 98년에는 50만명을 넘어서는 등 전자금융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1,400개에 달하는 국내 점포망을 2000년까지는 1,250개로 감축할 계획이라고 은행측은 연례보고서에서 밝혔다.
인터넷뱅킹이 은행 거래를 주도하게 되면 국경을 따라 서 있는 소매금융의 장벽도 무너지게 될 전망이다.
현재 전세계로 진출한 유럽의 대형 유니버셜뱅크들이 유독 활동 무대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소매금융 분야다. 현지의 금융기관들이 이미 깊이 뿌리 내린 소매금융 시장에 진출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 세계 점포망을 구축하고 일손이 많이 드는 창구 업무를 시작하는 것은 「밑지는 장사」라는 계산에서다.
이에 따라 도이체방크는 유럽 내에서만 소매금융을 취급하고 있으며, 크레디스위스그룹등 대부분의 유럽 은행들은 자국에서만 소매금융을 다루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유로 통화권에서 단일 금융시장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지만, 회계적·법적·문화적 이유때문에 리테일뱅킹은 대부분 자국 금융기관들의 영향권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도 소매금융업무에 진출한 HSBC는 현지 「토착화」 전략과 전세계 100여개국에 자동입출금기 30만개 이상을 설치한 대규모 인프라를 무기로 글로벌 리테일뱅킹에 나섰으나,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된다.
유럽내 다른 국가에 진출한 도이체방크의 소매금융도 대부분은 부유층을 상대로 한 금융서비스나 인터넷뱅킹 등 전자금융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도이체방크의 로널드 웨이처트 박사는 『수익성을 따져볼 때 유럽 외 지역에서 리테일뱅킹을 실시할 계획은 현재로선 전혀 없다』며 『세계 대부분의 은행 고객이 인터넷뱅킹을 활용한다면 생각해 볼만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ECB 보고서는 『국외 리테일뱅킹 진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점포망 설치』라고 지적, 『전자금융이 확산돼 점포망의 필요성의 줄어들면 국경을 넘어선 리테일뱅킹의 진출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크레디스위스그룹의 경우 리테일뱅킹은 241개 점포를 갖춘 크레디스위스가 스위스 내에서만 영업을 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수익을 내는데 도움이 되는 중산층 이상의 고객을 대상으로 한 제한된 소매금융 진출을 유럽내에 한해 추진하고 있다. 중산층 이상의 제한된 고객에게 일정한 소매금융 상품을 판매하는 프라이빗 파이낸셜 센터를 통해서다. 크레디스위스그룹은 지난 4월 이탈리아에 점포망을 갖추고 해외 소매금융의 첫 발을 내디뎠으며, 운용 결과에 따라선 스페인이나 독일, 프랑스 등 다른 유럽 시장으로도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물론 일정 기간 운용해서 수익이 나지 않는다면 이 계획은 그것으로 끝이 난다.
결국 유럽의 선진 금융기관들이 따르는 유일한 원칙은 「수익성」이다. 투자한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면 이들의 「소매금융 지역주의」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반면 수익이 안나도 「관행상」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국내 금융기관들의 현실이다. 현지에서 만난 국내 시중은행의 한 주재원은 『해외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한 소매금융이 소규모로 이뤄지고 있다』며 『인력이 많이 들고 거래 규모가 크지 않아 수익성은 없지만, 으례 하던 업무라 중단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추리히 런던 프랑크푸르트=신경립기자KLSI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