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가해진 서방의 경제제재에 러시아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제재에 직접 연관된 에너지기업의 시가총액은 하루 만에 25억달러(약 2조 7,000억원)나 증발했고 은행권에서는 뱅크런(대규모 자금 인출)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혼란이 러시아를 넘어 유럽 및 신흥국 경제와 국제유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최대 민영 에너지기업인 노바테크의 주가는 지난 21일 하루에만 약 8% 하락해 25억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됐다. 노바테크의 지분 23%를 소유한 겐나디 팀첸코가 전날 발표된 미국의 추가 제재 대상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날 러시아 종합주가지수 MICEX도 장중 3.7% 급락하다 후반 낙폭을 줄여 1% 하락 마감했다. 이로써 MICEX는 올 들어 13%나 하락했다. 러시아 루블화 가치도 21일까지 이틀 동안 1%나 하락했으며 10년물 국채금리는 9%대로 치솟아(가격 하락) 구제금융의 마지노선으로 평가되는 7%를 훌쩍 넘어선 상태다.
미국의 제재 대상에 포함된 은행 방크로시야에서는 뱅크런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방크로시야 지점들 앞에 예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방크로시야 계좌를 통해 카드값을 지불하는 고객의 카드를 정지시키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4일 영업을 시작하는 대로 방크로시야에 개인 계좌를 개설하겠다"면서 "이미 내 월급을 방크로시야 계좌로 송금하라는 지시도 내렸다"며 불안감 진화에 나섰다.
러시아가 가장 믿고 있는 에너지 분야에도 제재에 따른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20일 미국이 세계 4대 원유 거래업체인 군보르의 공동설립자 팀첸코를 제재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군보르 경영에는 당장 비상등이 들어왔다. 최고경영자(CEO)인 토르비요른 토른크비스트는 "(서방의 제재로) 은행으로부터 자금대출이 어려워지고 있다"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CNN머니는 "미국의 제재가 러시아 경제를 좀먹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도 "서방의 경제제재가 명백히 러시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자금조달 부담이 늘고 주식이 하락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러시아의 압박을 받는 우크라이나 경제도 위기에 직면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는 21일 "우크라이나로부터 받지 못한 가스공급대금 등 총 160억달러를 청구하고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가스 가격도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달러 대비 통화가치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우크라이나는 외채 등을 갚기 위해 약 40억달러의 급전이 필요한 처지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금융혼란이 러시아·우크라이나를 넘어 유럽과 신흥국 등 전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모건스탠리와 도이체방크는 유럽 경제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금융시장 혼란에 전염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프랑스 은행의 러시아 노출자금 규모는 510억달러에 달하며 오스트리아 은행권 자산의 1.4%는 러시아에 매여 있어 러시아가 국내에 있는 타국 자산을 동결할 경우 큰 타격이 예상된다.
러시아가 세계 2대 원유 생산국인 점도 문제다. 러시아 에너지기업이 서방의 제재에 연루됐다는 소식에 21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5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0.6% 오른 배럴당 99.46달러에 장을 마쳤다.
이런 가운데 크림반도를 둘러싼 군사·정치적 불안감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22일 AP통신에 따르면 친러시아 군인들은 이날 장갑차와 수류탄을 동원해 크림반도 내 우크라이나 공군기지 2곳을 급습, 이 과정에서 최소 1명이 부상했다.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간 국경을 완전 봉쇄했다고 러시아 인테르팍스통신이 전했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는 러시아 귀속 주민투표를 실시하자는 대규모 시위도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