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에 자금은 넘쳐나고 금리가 연일 떨어졌다고 야단들이지만 정작 자금수요자인 기업들은 찬바람이 불고 있다. 금리 인하는 정부와 금융기관만의 말잔치 마당이나 다름없다. 은행과 투신사는 자금이 넘쳐나 자기들끼리 돈놀이에 넋이 빠진 반면 기업과 가계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국제경쟁력도 날로 떨어지고 있다.
미국금리 인하와 엔화강세, 원자재값 안정 등 신3저에도 5개월째 지속중인 수출감소세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생색내기만 열중이다. 금리는 떨어지는데 돈은 돌지 않는다. 시중금리가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증시도 연일 오름세를 지속해도 기업에는 자금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 가계는 더욱 고통스럽다. 금리하락-기업 금융비용 절감-경기 활황-가계소득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깨진 지 오래다. 고열은 떨어졌으나 몸살감기가 계속되고 저혈압으로 고통받는 환자와 같다.
금융기관의 자금이 풍부하고 금리가 떨어지는데도 기업의 자금형편은 더 어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용경색 현상의 지속이 주원인이다. 은행 등 금융기관들은 언제 떼일지 모르는 대출을 극도로 억제하고 있다. 문제는 이대로 가다간 정부가 강력한 의지로 밀어부치고 있는 경기부양책도 실패하고 우리 경제는 더욱 깊은 나락으로 빠져든다는 점이다.
◇정부 의지와 시장과의 괴리=실업최소화, 경기부양 의지를 가지고 있는 정부는 은행권에 대출 활성화를 종용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정부 기대에 역행하고 있다. 정부가 경기진작을 위해 내놓고 있는 카드가 하나같이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총액대출한도 증액과 금리인하, 환매조건부채권(RP)의 금리 인하, 추석자금 방출과 인위적 자금회수 자제 등 정부는 공급을 계속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돈을 필요로 하는 기업의 자금난은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은행 고유계정의 대출은 지난 9월중 7조500억원 감소한데 이어 이달들어 14일까지 3조2,060억원 감소했다. 기업들의 자금 사정도 그만큼 악화됐다.
그런데도 정부는 실제 효과보다는 홍보에 매달리는 인상이다. 정부는 연초 30%대의 금리수준을 상기시키면서 금리 하락세를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돈이 금융권에서만 맴돈다=풀린 돈은 도대체 어디 있을까. 은행과 투신사, 콜시장을 오가고 있다. 돈이 금융권에서만 돈다는 얘기다. 이달들어 14일까지 투신사 수익증권에 새로 들어온 돈은 무려 17조7,286억원. 지난 9월 한달동안 늘어난 금액(10조1,835억원)보다 훨씬 많은 액수다. 순증액은 대부분 은행이 맡긴 돈이다.
투신사들은 은행 등이 맡긴 돈은 은행에 보낸다. 수시입출금식 예금인 MMDA나 콜이 자금이동 통로. 은행들은 투신사에서 돈을 예치하거나 빌려서 다시 투신사에 예치한다. 돈이 금융권을 멤돌면서 금리는 실제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턱없이 낮아진다. 시중의 체감자금난과 금리와의 격차는 이 때문이다.
◇꽁꽁 얼어붙은 대출 시장, 부익부빈익빈 심화= 은행들은 돈이 아무리 남아도 기업들에게 신규대출을 하지 않고 있다. 기업이 언제 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익은 적어도 안전한 금융기관간 거래에 메달리고 있는 것이다.
은행들은 「돈이 아무리 풀려도 부실 우려가 상존하는 한 대출을 늘릴 수 없다」고 항변한다. 기아자동차 정상화에만 최소 5조원 이상의 대출금을 탕감해줘야 할 처지다. 한 은행장은 『부실대출이 경영악화를 낳고 은행 자체의 퇴출로 이어지는 마당에 신규대출을 해줄 은행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일부 우량기업에겐 돈을 신규로 빌려주고 있지만 이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돈이 필요없는데도 은행의 종용에 못 이겨 대출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량중소기업으로 꼽히는 모 회사의 경우 돈이 필요없었지안 은행에서 10.5%의 대출금로 돈을 빌렸다. 하지만 그이상의 수익을 낼 자신이 없어 상호신용금고에 예치했다. 이는 운이 좋은 편. 요즘엔 신용금고도 거액 예금은 사절하는게 보통이다.
◇언제 풀릴까= 우리 경제의 동맥을 잡고 있는 신용경색이 언제 쯤 풀릴까. 금융기관의 대출기능이 정상화하는 시기에 달렸다. 하지만 당분간은 기대난이다. 우선 인원 감축 등 은행 구조조정기여서 어렵다. 앞으로 은행들이 뒤짚어 써야 할 신규부실도 적지 않다.
결국 내수진작, 기업 채산성 향상 등이 없는 한 신용경색, 자금시장 왜곡도 별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내년초까지는 지금과 같은 구도가 그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은행과 제2금융권은 여신보다는 자금 단기운용으로 수익을 올리는데만 골몰하고 있다. 지난 12일 1조2,000억원어치의 국채입찰에 3조300백억원어치가 응찰했다는 점은 금융기관들이 대출보다는 유동성 확보와 단기자금 운용에 치중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권홍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