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6일] 로마의 약탈


1527년 5월6일,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왔다. 왜 ‘로마제국의 후신’이 로마를 침공했을까. 황제와 교황, 스페인과 프랑스의 알력 탓이다. 로마 진격의 전초전은 1525년의 파비아 전투. 수 차례 정략결혼의 결과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까지 지배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서 패한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가 도전장을 던진 싸움이었다. 전투는 프랑스의 완패로 끝나고 포로로 잡힌 프랑수와 1세는 금화 개수를 헤아리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는 1차 석방금 120만크라운을 내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복수를 노리던 프랑스가 돈 많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동맹을 맺자 격분한 카를 5세는 군대를 로마로 보냈다. 전투 결과는 예고된 것이었다. 스페인군 6,000명과 독일 용병단 1만6,000여명으로 구성된 황제군에 비해 교황의 군사는 5,000명에 불과했으니까. 황제군은 싸움이 끝난 뒤에도 로마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관례였던 약탈기간 3일보다 닷새 많은 8일간의 약탈을 허락 받은 병사들에 의해 민간인 4만5,000여명이 죽거나 집을 잃었다. 고대 로마의 건축물과 고문서도 불탔다. 도시의 파괴를 넘어 로마문명의 자취를 쓸어버렸던 ‘로마의 약탈(Sack of Rome)’은 증오를 키웠다. 참전수당을 약탈로 찾으려던 용병단의 중추가 루터파 신교도였다는 점에서 반(反)종교개혁의 공감대가 퍼졌다. 거액의 몸값을 내고 목숨을 건진 교황은 메디치 가문 출신 대공녀를 프랑스로 시집 보내는 등 프랑스와의 관계를 더욱 다졌다. 프랑스 역사의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위그노(신교도) 대학살도 메디치 가문 출신인 두 명의 프랑스 왕비가 주도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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