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출구전략 우려로 외국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자국 통화가치 추락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터키는 보유외환을 사상 최대 규모로 시장에 풀었고 인도는 중앙은행이 직접 기업들의 달러 환전을 관리하기로 하는 등 고강도 개입에 나섰다. 브라질ㆍ인도네시아 등은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경기둔화로 돈을 풀어야 하는 상황에서 해외자금 이탈을 막기 위해 금리인상을 검토해야 할 처지로 몰리며 신흥국 중앙은행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환율방어 못지않게 경기부양이 다급해진 가운데 이들에게 남아 있는 카드는 많지 않아 보인다.
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이날 터키 중앙은행은 하루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인 22억5,000만달러를 풀어 리라화를 사들이는 한편 강력한 통화긴축 프로그램을 추가로 시행한다고 밝혔다. 터키가 중앙은행의 보유외환(450억달러 미만 추정)의 5%에 이르는 막대한 양을 한꺼번에 푼 것은 급격히 추락하는 리라화를 방어하기 위해서다. 리라화 가치는 지난 5월부터 이달 사이에만도 8.6% 가까이 빠져 5일에는 달러당 1.9737리라까지 주저앉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같은 달러화 매도개입이 환율방어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터키 중앙은행은 이미 지난달 11일부터 보유외환의 10%에 가까운 약 42억달러를 시장에 풀었지만 리라화 약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알리 카키로글루 HSBC 자산투자전략가는 "오는 23일 통화정책회의를 앞두고 금리인상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면서 "터키 중앙은행은 현행 4.5%인 기준금리를 인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 정부도 환율방어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달 26일 달러당 60.7650루피로 마감해 최저점을 찍었던 루피화는 8일 한때 61.2125루피까지 하락해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5월22일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의 출구전략 언급 이후 현재까지 하락폭은 9%에 달한다.
이에 인도 중앙은행(RBI)은 자국 정유회사들이 정규 환시장이 아닌 별도창구를 통해 원유수입대금용 달러화를 구입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달러 수요가 큰 정유회사들의 환전이 외환시장에 주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RBI가 직접 기업들에 달러를 파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주 통화정책회의를 앞둔 브라질·인도네시아도 통화방어를 위해 기준금리 추가 인상 등 적극적인 개입을 지속할 것으로 관측된다. 브라질 정부는 앞서 토빈세 폐지, 200억달러 규모의 파생상품 매각 등 환율방어 노력을 기울였지만 헤알화는 지난 두달 동안 10% 넘게 떨어지며 달러당 2.26헤알대로 주저앉은 상태다.
인도네시아 역시 올 들어 4% 가까이 하락한 루피아화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보유외환을 대거 풀고 있다. 전문가들은 각각 10일과 11일에 통화정책회의를 여는 브라질과 인도네시아가 지난달에 이어 이달에도 기준금리를 올릴 것으로 내다봤다.
이 밖에 러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페루·폴란드를 비롯한 다른 신흥국들도 통화가치 붕괴를 막기 위해 보유외환 매각에 나서고 있다. 매닉 나라인 UBS 전략가는 "신흥국들은 지난 5년간 연준의 전례 없는 양적완화 덕에 큰 이득을 봤다"면서 "이제 연준이 출구전략에 나선 만큼 이들도 통화를 조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최근 경기가 둔화되는데도 오히려 통화긴축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딜레마에 빠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통화긴축이 경기성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로 이도저도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로이터는 "터키·남아공 등 대외수입 의존도가 커 기준금리 인상이 급한 국가를 제외하면 인도·러시아·폴란드 등은 경기부양이 시급한 만큼 달러화 매각 외에 섣불리 다른 고강도 대책을 시행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