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컬럼] 문화 귀족, 문화 천민
홍현종 hjhong@sed.co.kr
갈수록 문화 동네도 묘하게 흐르고 있다. 그리 먼 옛날 얘기도 아닌, 문화가 풍류로 통하던 시절, 문화 마을 한가운데는 늘 사람의 향기가 났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요즘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건 그저 돈, 돈 냄새다. 왜 그럴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문화가 산업이란 녀석과 만나며 생겨난 부작용 탓이다. 물신(物神)의 광기가 문화 동네 깊숙히 파고 들면서 일반인에, 예술인들까지도 문화와 자본의 경계 위에서 방황하며 자신의 문화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서글픈 건 그 같은 시류(時流)에 대한 담론부터 경제 논리에 묻혀 버리고 마는 시대 분위기다.
양극화의 또 한마당, 문화계
50만원을 넘나드는 고가 공연들이 줄을 이으며 이른바 문화 귀족 논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몇몇 이름있는 공연들의 로얄석 값은 웬만한 아르바이트생의 한달 급료. 어찌된 일인지 우리보다 잘 사는 미국이나 일본보다도 비싼 이유가 업계의 설명만으로는 어째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사는 동네로 계층 구분이나 하는 ‘허세’의 시대, ‘과시용’ 공연 보기에다 비싼 공연의 관람 여부가 신분을 가늠하는 또 다른 잣대가 되고 있다는 강 너머 사람들 얘기는 문화를 향한 모독이다.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다는 미술계. 부동산에서 주식으로, 넘치는 유동성은 이제 미술 시장도 ‘쩐(錢)의 판’으로 만들고 있다. 소수 이름난 작가의 그림은 걸리기도 전, 입도선매되고 경매장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자신들이 관리하는 특정 작가 띄우기를 주저치 않는 몇몇 경매사들의 마켓 타깃은 서민층일 리 없다. 모두가 함께 하는 잔치처럼 보이는 것뿐 가는 작가만 가고 버는 사람만이 벌어 들이는 미술판은 여전히 ‘그들 만의 축제’다. ‘세력’은 주식시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찍어내듯 작품을 파는 미술판은 양극화의 한마당이다.
영화판도 빠지지 않는다. 업계 전반은 죽을 쑤며 앓는 소리를 내는 상황에 몇몇 스타 주머니로 빨려 들어가는 돈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액수. 아무리 인기의 대가라고는 하나 다 같은 삶인데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무대 한쪽에선 끼니 값도 못 챙기는 판에 인기와 명예 돈 모두를 싹쓸이해가는 스타란 과연 자본주의라는 신(神)의 위대한 창조물이다.
태생적으로 빈부의 차이를 만들 수밖에 없는 구조의 신자유주의. 그 교조적 믿음 속 세상이 온통 그리 흘러가는 데 문화계만 별반 다르랴. 그러나 뒷맛은 분명 씁쓸하다. 적어도 물질이 아닌 문화라는 정신 가치의 영역에서조차 나타나고 있는 극단적 쏠림. 그걸 천부(天賦)의 권리처럼 여기는 특권층. 시장 만능 만을 여전히 외쳐대는 그들 앞에 대중들은 그저 초라하다.
성장과 분배. 양극화와 직결된 이 문제는 그래서 이 정권 들어 번번이 논쟁의 도마 위 단골 메뉴였다. 집권층의 실정이 거듭되며 초기 고개를 쳐들던 분배론은 ‘후(後) 분배’를 위한 성장 우선론에 밀려 슬그머니 찌그러져 있는 형국이다. 진보니 보수니 그 지겨운 줄서기가 어떻든 세상이 두쪽나도 ‘합리적’ 수준의 공정한 분배는 인간의 평등과 기본권에 관한 문제임은 문화라고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문화 공유 위한 정책 펴야
시장이 극단으로 쏠릴 때 필요한건 중심 조절이다. 충격 없이 노련하게. 그게 정책이다. 예컨대 도서관과 미술관ㆍ공연장 등 사회 전반의 문화 인프라 속으로 대중들이 보다 폭넓게 파고 들 수 있도록 머리를 짜내는 것은 정부의 일이다. 문화 귀족화를 오히려 부추기는 측면이 있는 현행 메세나 제도의 경우 제대로 대중을 향하도록 방향을 틀게 만드는 건 기업과 민간의 몫이다.
나라를 끌겠다는 사람들이 표에만 눈이 어두워 달콤한 공약에만 급급하고 문화 비전에 대한 관심을 피해가는 것은 문화를 읽는 이 시대 시각을 말해준다. 문화란 당대를 넘어 후대로 이어지는 우리 삶에 가장 파급 효과가 큰 어젠다다. 정책의 우선 순위에서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문화 동네를 거니는 데 귀족과 천민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 천박한 가름의 상황부터 거둬내야 우리 시대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입력시간 : 2007/10/22 1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