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9일] 사상최대의 몸값


1356년 9월19일, 프랑스 중서부 푸아티에. 영국군을 맞은 프랑스군은 두배의 병력과 우세한 지형에도 밀리기 시작했다. 투구가 날라간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발견한 영국군 기사가 외쳤다.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죽은 목숨이다.’ 칼을 내린 왕은 포로로 잡혔다. 영국은 프랑스왕을 정중하게 모셨다.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다. 2년6개월의 흥정 끝에 결정된 석방 조건은 금화 400만크라운. 영국 돈으로 60만파운드, 연간 화폐제조량의 6배가 넘었다. 장 2세는 영토의 절반인 칼레에서 피리네에 이르는 서부지역까지 내주기로 약속했다. 가혹한 조건에 반발한 프랑스는 항전을 계속하며 재협상에 들어갔다. 1360년 5월 체결된 브르티니협정에서 합의된 몸값은 금화 300만크라운에 영토 3분의1 할양. 몸값치고는 사상 최고액이다. 첫번째 분할지급금이 지불된 후에야 장 2세는 4년간의 포로생활에서 풀려났다. 줄었지만 배상금은 프랑스에 엄청난 부담이었다. 실권을 갖고 있던 황태자에 의해 몸값 지불이 지연되자 장 2세는 ‘명예가 떨어졌다’며 1364년 제 발로 영국에 건너가 포로를 자처, 1년 뒤 영국에서 생을 마쳤다. 거액의 몸값은 보이지 않는 두 가지 흔적을 남겼다. 프랑스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추방했던 유태인을 다시 불러들이고 번영을 구가하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휘청거렸다. 기대했던 배상금 수입이 끊긴 영국이 이탈리아 상인들로부터 빌린 백년전쟁 비용, 즉 은행 대출금을 떼어먹었기 때문이다. 마침 오스만투르크의 등장으로 동방무역이 막힌 상황. 전쟁대출금까지 떼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경제력이 약해지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거액의 몸값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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