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일에 임박해 예약을 취소하면 이유와 관계없이 환불을 해주지 않는 여행사의 오랜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법원은 '출발 14일 이내 취소는 환불이 안 된다'는 여행사의 개별 약정 조항 자체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29일 법원 등에 따르면 서울서부지방법원 제2민사부(이인규 부장판사)는 최근 신혼여행을 취소한 이모씨가 여행사를 상대로 "예약금액을 모두 돌려달라"며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1심의 판단을 뒤엎고 여행사가 예약금 전액을 환불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소비자의 사정으로 여행을 취소할 경우에도 예약금 전액을 돌려줘야 한다는 판결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판결에서는 여행사나 항공사의 사정으로 여행을 취소했을 때만 예약금 100% 환불이 인정됐다.
이 모 씨는 지난해 1월5일 출발하는 4박 5일 일정의 태국 푸껫 신혼여행 상품을 총 346만원에 한 여행사와 계약을 맺었다가 출발 3일 전인 1월2일 예약을 취소했다. 이씨의 신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전치 5주의 좌측 다발성 골절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씨가 작성한 계약서 제15조 2항에는 '질병 등 여행자의 신체에 이상이 발생해 여행에 참가가 불가능한 경우'와 '배우자가 신체 이상으로 3일 이상 병원에 입원할 경우'에는 별도의 손해배상 없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문구가 있었다. 이씨는 이를 근거로 예약금액 전액 환불을 요청했다.
하지만 여행사는 별도로 맺은 개별약정 '제5조'를 들어 환불을 거부했다. 이 조항은 '신혼여행상품의 경우에는 여행자가 여행 출발 14일 전부터 출발 당일까지 계약을 취소하면 취소사유를 불문하고 환불을 받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다만 여행사가 이후 항공료 등 172만여원을 돌려줘 문제가 되는 돈은 남은 173만5,400원이었다.
1심을 맡은 판사는 여행사가 44만5,400원만 돌려주면 된다고 판결해 사실상 여행사의 손을 들어줬다. 1심 판사는 "원칙적으로 여행사는 이씨에게서 받은 돈을 반환할 의무가 있지만 이행불능을 초래한 원인이 이씨에게 있으므로 여행사에 항공권 환불 수수료 등의 금액까지 반환하도록 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전액 환불이 맞다고 봤다. 재판부는 "약관 5조는 취소사유가 무엇인지, 여행업자가 실제로 입은 손해가 얼마인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환불을 일체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는 사업자의 원상회복 의무를 부당하게 경감해 무효"라고 밝혔다. 이어 "이씨의 신부가 5주간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어 약관 15조에 의해 여행자의 배상 책임이 없는 경우이므로 여행사가 입게 된 손해만큼은 환불할 수 없다는 주장도 이유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유사한 형태의 개별약정을 이용해 환불을 피하는 여행업계의 관행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사건을 대리한 신태광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울서부지구 공익법무관은 "여행사들은 통상 개별약정이 약관에 우선한다는 원칙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가 마련한 국외여행표준약관과 별개로 개별약정을 맺은 뒤 이를 근거로 취소사유를 불문하고 환불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며 "이번 판결로 이 같은 조항이 법적 무효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