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의 가입자 수는 2,500만명(올 4월 말 기준)에 이른다. 국민 보험으로 불리는 자동차보험보다도 700만명이 많은 숫자다.
국민 생활에 미치는 위상과 비중이 이처럼 크지만 실손보험에 대한 정부의 관리는 자동차보험에 훨씬 못 미친다. 자동차보험만해도 국토해양부 산하에 의료분쟁심의기구와 자동차보험정비협의회가 있어 정부가 의료계와 보험사, 정비 업체와 보험사 간의 이해 조율에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실손보험에는 이런 기구가 없다.
갈등 조정 창구가 없다 보니 의료계와 보험사 간에 협의는 없고 반목과 질시만 커지는 형편이다. 보건복지부 등 관련 부처 밑에 의료분쟁심의기구를 두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그간 국민건강보험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애써왔다.
최근 정부가 몇몇 주요 질병에 대해 행위별 수가제 대신 의료비에 상한선을 둔 포괄수가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단적인 예다. 이런 노력의 결과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는 급여 부문의 원가보전율(수입/비용)은 75%(2006년 기준)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만큼 철저히 비용을 통제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역으로 급여 수가가 현실화되지 않다 보니 병원 입장에서는 정부 개입이 없는 비급여 부문에서 수익을 보전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비급여 부문의 원가보전율이 192.3%나 되는 것은 이런 환경의 산물이었다. 냉정히 말하면 국민건강보험을 통해 급여 보장 영역의 확대를 꾀하면서도 급여 수가는 현실화하지 않는 정부의 '이율배반적' 원죄 때문에 비급여 의료비를 농단하고 있는 의료계에 메스를 대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돼왔다고 볼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보험사와 의료계의 충돌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중간자적 입장에 서 있는 정부가 나서는 수밖에는 없다"며 "자동차보험의 진료 수가도 부처 산하의 심의기구에서 관련 갈등을 조율하고 있는 만큼 이를 원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설사 급여 수가가 현실화된다 해도 전문가로서 의사들의 끝도 없는 기대수익을 적정선에서 잡기 위해서는 비급여 부문의 투명화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렵고 끈기를 갖고 추진해야 할 사안"이라고 진단했다.
금융 당국도 이런 문제 의식에 공감하고 있다.
이번 실손보험 개선안에도 비급여 항목의 영수증 표준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법적 제재 수단을 주는 방안 등을 내년까지 추진한다는 계획이 들어가 있는 상태다.
금융위원회는 이달 내로 복지부 산하에 있는 개인의료보험협의회를 열어 개선 대책의 후속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비급여 항목 코드화 등을 제도권에서 논의하기 위한 첫 단추를 끼운 셈"이라며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만큼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보험 업계 고위 관계자는 "일부 급여 항목에 대해 포괄수가제를 실시하는 것을 두고도 의료계의 반발이 심해 홍역을 겪고 있는 마당에 비급여 부문을 통제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의료계도, 보험사도 아닌 고객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자세로 정부가 관련 작업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