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헌법으로부터의 도피
김인모 논설위원 iak@sed.co.kr
우리 헌정사만큼 굴곡이 심했던 경우도 드물지만 최근 우리 헌법이 또다시 수난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 1948년 처음 만들어져 17일로 59돌을 맞기까지 9차례나 개정을 거듭했으나 87년 6ㆍ10 항쟁 이후 여야 합의로 태어나 20년을 지켜온 게 현행 헌법이다. 그런데 참여정부 들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헌법의 수호자인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를 당하는가 하면 대통령이 아니라 '자연인 노무현 명의'로 헌법기관인 선관위가 헌법재판소에 제소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더욱이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우리 헌정제도, 다시 손질해야 합니다'는 제목으로 다시 한번 개헌 공론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반면 헌법소원의 당사자라는 이유로 이강국 헌법재판소장과 고현철 중앙선관위원장이 불참 의사를 통보함에 따라 제헌절 5부 요인 만찬마저 갑자기 취소된 올해 제헌절은 시민들에게는 마지막 공휴일이기도 했다. 2005년 국무회의에서 오는 2008년부터 제헌절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기로 규정을 바꿨기 때문이다. 쓸쓸하기만 한 이날 시민들은 다른 공휴일을 줄이더라도 제헌절은 계속 공휴일로 지켜져야 한다는 의견을 58.8%나 내놓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고 소극적 자유가 속박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면 적극적 자유는 참된 자아실현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은 적극적 자유로 나아갈 수 없을 때 참을 수 없는 고독과 무력감의 상태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 한다고 밝혔다. 이 도피 의식은 새로운 권위주의에 대한 복속이나 수동적인 집단주의적 생활양식에 길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변한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개체화가 촉진되면 될수록 개인의 자유가 신장되지만 동시에 책임도 증대되어 끊임없이 '자유로부터 도피' 하려는 욕구가 커지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이 하늘이 준 천부의 인권이라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구현한 헌법은 바로 자유와 평등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놈의 헌법'은 단순히 헌법에 대한 모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달리 말하면 '헌법으로부터의 도피'요, '자유와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라고도 할 수 있다. 대통령의 선거중립 의무가 당연한 이유는 헌법정신이야말로 사회통합의 기초가 돼야 하며 그 한가운데 헌법의 수호자인 대통령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우리 헌법이 수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무엇보다 최근 들어 정체성의 혼란이 비대해져 법치주의라는 근간이 허물어지고 있는 탓이라 할 수 있다. 불법파업이 노동운동의 일상이 되고 공권력 투입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부되던 과거가 아직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35년 전인 72년 10월17일 유신헌법이라는 괴물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지키려 했던 헌법정신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정치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적 선택과 판단이 한편으로 치우치면 처음에는 단순한 혼란을 불러일으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결국에는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야기할 우려가 높다. 최근 헌법재판이 많아진 것도 지나친 정치 과잉현상을 정치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현행 헌법이 민주주의를 제약하고 정치의 비효율성을 조장하고 있다면서 그 헌법에 판단을 요청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헌법조항이 영원히 고쳐서는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겠지만 헌법정신이야말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가치와 준범이 돼야 할 것이다.
입력시간 : 2007/07/18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