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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릴 때까지만 해도 앞이 안 보이게 쏟아지던 비는 경상남도 함양에 도착하자 가랑비로 변했다. '취재고 뭐고 다 틀렸다' 싶었는데 우산을 쓰면 걸을 만은 했다. 하지만 빗속에 찾은 화림동 계곡에는 누런 흙탕물이 넘치듯 흘러내려 카메라를 들이대기 민망했다. 첫날 취재방향은 한옥마을과 상림 같은 읍내 가까운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 들어 '비가 그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 선잠을 자다 깨다 눈을 뜨니 창밖은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칠선계곡 =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추성계곡)은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더불어 손꼽히는 3대 계곡 중 하나다.
추성동 칠선계곡은 일단 초입부터 관광객들의 군기를 잡는다.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오르막은 약 800m.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곳만 지나면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숨을 돌릴 여유를 준다.
칠선계곡을 따라 오르는 코스는 두 가지인데 일반인이라면 계곡길 대신 산허리를 타고 오르는 코스를 택하는 게 좋다. 이곳으로 오르면 선녀탕까지는 물 구경을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계곡을 따라 오르는 코스에 비해 안전하기 때문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코스는 지금처럼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여름철에는 특히 위험하다. 칠선계곡의 총 연장은 18㎞이지만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에 달한다.
18㎞ 구간에는 7개 폭포와 33개의 소가 있는데 전날에 퍼붓던 비에도 이곳 물은 옥수처럼 맑았다.
추성동 초입에서 계곡을 따라 2㎞ 남짓 오르면 두지동이 나오는데 이곳에는 두메산골에 걸맞은 모습의 구멍가게 두 곳이 있다. 첫 번째 가게를 지나칠 때 막걸리를 마시던 주인이 "두지야, 손님들 바래다주고 와라"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 개를 깨웠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황구는 주인말에 최소한의 성의 표시만 하더니 다시 드러눕는다.
구멍가게 강아지 '두지'가 지키고 있는 지리산의 추성동 코스는 아래서부터 위로 용소·선녀탕·비선담·칠선폭포·대륙폭포·삼층폭포·마폭포를 거쳐 천왕봉에 당도하는 동안 암반에 맑은 물이 흐르는 경관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상림 =상림은 신라 말에 고운 최치원이 조성한 한국 최초의 인공림이다. 숲의 면적이 21㏊에 달하며 그 중 연밭은 2만여평에 이른다. 상림을 찾은 날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우산을 받치고 걸었는데 우거진 숲길은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상림에는 40여종의 낙엽관목 등 116종의 나무가 1.6㎞ 둑을 따라 80~200m 폭으로 조성돼 있고 들어가면서 오른편 늪으로는 연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연밭에는 세계 각지의 연들이 식재되고 있어 찬바람이 불기 전까지 형형색색의 연꽃을 구경할 수 있다.
◇지리산 제1문과 오도재 =함양군 구룡리에서 지안재를 넘으면 휴천면에 다다르고 여기서 다시 오도재를 넘으면 마천면이 나온다.
휴천면과 마천면 사이에 위치한 지리산 제1관문은 해발 773m로 이곳에 서면 지리산의 천왕봉을 비롯한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도재는 'S'자가 여러 개 겹쳐진 모양으로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타이어 제조업체가 CF를 찍어 유명해진 곳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사진작가들이 자동차에서 흐르는 불빛을 찍으려고 제1관문에서 북쪽으로 렌즈를 들이대고 진을 친다.
제1관문 앞에는 장승들이 열을 지어 서 있는데 한때는 이 장승들 대부분이 남성을 상징하는 형상이었으나 "선비의 고장에 웬 흉물이냐"는 유림들의 반발로 평범한 장승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같은 상징물이 세워진 까닭은 변강쇠와 옹녀가 만나 지리산에 들어가 살았다는 전설이 이곳에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내용이 너무 적나라해 대중 앞에서는 불리지 않는 판소리 가루지기 타령에도 "변강쇠와 옹녀가 만나 마천에 들어가 살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오도재 정상에서 마천 방면으로 내려오다 지리산 조망공원에 들러 눈요기를 하는 것도 좋다. 지리산 하봉에서 중봉, 천왕봉을 거쳐 세석평원·벽소령·반야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넓은 광장과 휴게소가 조성돼 있다.
/함양 = 글·사진 우현석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