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한 지 불과 1시간40분 남짓, 착륙을 알리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 및 러시아 북해항로의 시작점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20여 년 전까지도 내국인조차 출입이 통제될 정도로 폐쇄적인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인도 비자 없이 입국해 관광할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다. 현지의 한 외국인 무역중개상은 "10년 전만 해도 외국인이 연해주 일대를 돌아다니면 대낮에도 길거리에서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고 연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다"고 소개했다. 중국·한반도와 접한 극동지역을 태평양의 경제중심지로 만들겠다는 러시아 정부의 구상은 해군기지였던 이 도시를 국제 상업도시로 변모시키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극동개발은 30년 전부터 본격화됐다. 옛소련 시절이던 지난 1986년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은 공개연설에서 "극동지역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창문으로 만들겠다"며 시발탄을 쐈다. 후속으로 소련 정부는 1998년 '극동경제구역 등의 생산력 종합개발 장기국가 프로그램 2000'이라는 이름으로 14년짜리 장기계획을 내놓았다. 소련 해체 및 러시아 정부 수립 이후 '극동 및 자바이칼 경제-사회 개발' 사업 등의 이름으로 대체된 이 사업은 1996년부터 2014년까지 총 일곱 차례의 수정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추진돼왔다. 1988년의 장기국가 프로그램까지 포함하면 총 7전 8기의 도전을 한 것이다.
그 결과 2011년 이후 극동지역의 지역내총생산(GDRP) 성장속도는 1999년 대비 두 배를 넘어서는 성과를 냈다. 2009년부터 2012년 기간에는 러시아 전체 고정자산 투자액의 8% 이상이 극동지역에 투입됐다.
그러나 극동지역은 워낙 오랜 기간 낙후됐기 때문에 여전히 사회기반시설이 열악하다. 2012년 현재 극동지역의 철도 밀집도는 국토 1만㎢당 14㎞에 그쳐 러시아 전국 평균치(50㎞)를 크게 밑돌고 있으며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7%대(2013년 기준)에 불과하다.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스크바 등 서부지역 대도시로 떠나면서 2014년 극동연방관구 인구는 1990년 대비 22.6% 감소한 622만7,000명에 그쳤다.
이에 따라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는 규제완화와 제도정비를 통해 극동지역의 외국인 투자 유치에 한층 박차를 가하고 있다. 투자유치는 경제특구의 일종인 자유무역지대와 토르(선도개발구역·TOR)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연해주투자청의 야스케피치 엘레나 부청장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하기 위한 방안이 오는 7월까지 마련될 예정"이라며 "제조·물류시설 투자유치를 위한 조세감면, 관세혜택, 행정간소화 방안 등이 협의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러시아 정부는 중화자본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에서 60㎞ 떨어진 크네비치 국제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건설 중인 대규모 카지노 복합 리조트가 러시아와 중국 간 합작의 대표적 사례다. 마카오의 화교자본이 투입돼 이르면 다음달 문을 여는 카지노 복합 리조트다. 현지의 한 소식통은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이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카지노 등을 꼼꼼히 살피고 갔다"며 "정부 차원에서 중국자본과의 합작사업에 큰 관심이 있다"고 귀띔했다. 트로이차 항만도 러시아 물류대기업 슘마가 중국자본을 끌어들여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상공회의소의 비탈리 리아시콥스키 회장은 "이제 러시아와 중국은 경쟁과 갈등 관계가 아니라 협력동반자 관계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선결 과제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투자유치를 위한 행정 간소화·투명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푸틴 대통령이 2008년 수세기 동안 중국과 영토분쟁을 겪어온 아무르강(흑룡강) 일대의 우수리스키섬(중국명 헤이시아치)의 절반을 과감히 중국에 할양해 투자를 유치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같은 문제 때문에 여전히 민간투자는 지지부진하다. 이 섬을 방문하려는 기자의 요청에 한 연해주 당국자는 "허허벌판인데다 도로사정도 좋지 않고 방문하려면 사전 통행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난색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