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우려로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올 하반기에 도래하는 국내 기업들의 회사채 만기 물량이 20조원에 달해 기업자금 시장에 비상등이 켜졌다. STX 사태와 미국 양적완화 축소, 중국 경기둔화 등 3각 파도가 몰려오면서 회사채 금리가 치솟아 대규모 신용경색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여전히 미온적인 대처에 나서고 있어 시장에서는 기업 유동성 개선을 위한 대책을 서둘러 내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3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하반기 중에 만기가 도래하는 국내 기업 회사채 물량은 19조8,555억원에 이른다. 올 상반기 만기도래 회사채 물량(19조4,030억원)을 웃도는 수치다. 월별 만기 금액을 보면 당장 다음달 1조7,681억원을 시작으로 8월 3조3,504억원, 9월 4조3,101억원에 달한다. 특히 10월에는 5조원대의 회사채 물량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면서 하반기 정점을 찍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STX 사태로 회사채 시장이 이미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미국 양적완화 축소와 중국 경기침체 등까지 겹치면서 하반기 국내 자금조달 시장이 급속히 냉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국내외 악재로 회사채 금리가 급격히 상승, 자금조달에 나서는 국내 기업들의 부담이 늘 수 있다는 것도 회사채 발행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자칫 회사채 인수 수요마저 사라지면서 '회사채 만기도래→자금조달 실패→만기도래 물량 결제 불가→회사 신용등급 하락' 등 악순환이 이어질 경우 국내 기업들이 신용경색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더구나 최근 들어서는 BBB-의 비우량 회사는 물론 신용등급이 양호한 우량회사채 금리마저 치솟아 자금난에 몰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국내 한 증권사 연구원은 "최근 악재가 잇따르면서 하반기 국내 회사채 시장의 불안감이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며 "자금조달에 실패한 회사의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등 국내 기업들이 신용경색이라는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증권사 연구원도 "올 초 조선이나 해운ㆍ건설 등 업황이 좋지 않은 일부 기업군에서 이제는 신용등급 A- 이상의 우량기업마저 자금조달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1일 신용등급 AA- 이상인 기업의 회사채 금리는 3.40%까지 올라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BBB- 이하 기업의 회사채 발행금리도 마찬가지로 이날 9.05%를 나타내면서 지난 해 7월28일 이후 약 1년 만에 9%대를 넘어섰다.
올 들어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한 한진ㆍSTXㆍ동부ㆍ금호아시아나ㆍ대한전선ㆍ성동조선 등 6개 기업은 자금압박에 더욱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특히 STX그룹(5,800억원)과 동부그룹(4,220억원)의 경우 올 하반기에 상대적으로 많은 물량의 만기가 도래해 자금 리스크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회사채 자금조달 시장에 이미 빨간불이 켜졌지만 금융당국은 아직까지 미온적인 입장이어서 자칫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금융감독원의 한 고위관계자는 "일부 업종이나 특정 기업에 대해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사실이나 근본적으로 투자수요 자체가 감소한 것인지, 회사 발행금리가 시장의 기대보다 낮아 투자자의 관심이 떨어졌는지는 앞으로 알아봐야 할 부분"이라며 "회사채 간 스프레드가 크게 벌어지는 등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채권안정펀드나 회사채 신속 인수제도 등의 조치에 나설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도 "지금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모니터링에 나서고 있지만 신용경색 등 조짐이 포착될 때는 여러 정책적 조치에 나설 것"이라며 원론적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지금이 금융감독당국이 나설 때"라고 강조했다. 앞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금융당국이 제때 해법마련에 나서지 않아 위기를 자초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다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나서기냐"며 "미리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신용경색 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증권사 채권담당 연구원은 "이제는 금융당국이 기업 유동성 증가 등의 카드를 꺼낼 시기"라며 "산업은행 등이 유동성을 공급하거나 펀드자금을 회사채 매입에 투입하도록 유도하는 등의 조치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증권사 채권담당 연구원은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 등을 발행하거나 신속 회사채 인수제도를 도입하는 등 금융당국의 움직임 없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미국 양적완화 축소에 따른 글로벌 자금경색 등의 여파로 국내 투자자들이 회사채 투자를 꺼릴 수도 있어 조선이나 해운ㆍ건설과 같은 기업들을 우선으로 회사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에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