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말 기준 시중통화량(M2)은 1,789조69억원(평균 잔액)으로 1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증가율로 따지면 2월부터 5개월 연속 5%를 넘었다. M2에는 유동성이 낮은 만기 2년 이상의 장기금융상품은 빠진다. 시중의 자금흐름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데 M2가 늘면 그만큼 자금의 단기부동화가 심화되고 있고 돈이 넘친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돈은 넘쳐나지만 부동산이나 중소기업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행이나 기업 등이 지나치게 건전성을 중시하다 보니 돈이 돌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당국의 이율 배반…"건전성 강화 요구하면서 취약ㆍ중기에 돈 풀라"=저신용자에 대한 10%대 소액대출상품에서부터 연체이자율 인하, 최고대출금리 2%포인트 인하, 프리워크아웃(사전 채무조정) 활성화 등…. 은행권은 올 들어 경쟁적으로 취약계층을 향해 대책을 쏟아냈다. 시중은행의 리스크담당 임원은 "서민용 대출상품은 어느 정도 떼일 것을 각오하고 출시한다"고 털어놓았다. 부실을 감내하고서라도 당국의 정책에 행보를 맞추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와중에 금융감독 당국은 한편으로 은행의 건전성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율배반이다. 7월 말 현재 국내 은행 원화 대출채권 잔액은 1,090조9,000억원으로 6월보다 0.12%(1조3,000억원) 늘었다. 연체율은 1.36%로 높아졌다. 연체율이 올라가자 감독 당국은 곧바로 은행의 부실채권 비율을 기존의 1.5%에서 1.3%로 낮추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연체율을 낮추기 위해 부실 가능성이 높은 곳에 대한 대출을 줄이고 여신 회수 등을 통해 목표치는 쉽게 맞춘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당국은 연체율 관리와 함께 중소기업이나 취약계층에 대한 대출도 늘리라고 압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책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카드사태 직전의 예를 들기도 했다. 실제 당국은 2002년 11월19일 '신용카드회사 건전성 감독 강화대책'을 발표했다. 여신을 축소하는 게 골자였는데 당국의 압박에 따라 카드회사들은 85조원이 넘던 여신을 몇 개월 새 50조원선으로 축소했다. 카드회사의 건전성은 다소 개선됐지만 자영업자의 도산이 이어졌고 신용불량자가 속출했다. 금융지주의 한 고위관계자도 "건전성 감독과 중소기업ㆍ취약계층의 유동성 관리를 함께 해야 할 당국의 고충도 이해하지만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내놓으면 결국 금융회사는 '건전성'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수중기, 돈 더 필요하다는데…수출중기 등에만 쏠리는 지원책=한국은행이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대출 수요를 조사한 결과 중소기업은 하반기로 갈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3ㆍ4분기 대출수요지수는 31로 2009년 1ㆍ4분기에 30을 넘어선 뒤로 가장 높았다. 내수 부진, 수출 둔화 등의 영향 탓에 영업활동을 통한 현금 창출능력이 떨어져 운전자금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게 한은의 분석이다.
하지만 실제 자금 집행은 수출중소기업에 쏠려 있다. 내수를 위주로 한 일반 중소기업 등은 아무래도 신용위험이 큰 탓이다. 중소기업의 신용위험지수는 지난해 3ㆍ4분기에 9에 불과했지만 올 3ㆍ4분기는 44로 집계됐다. 한은 관계자는 "내수경기 둔화로 음식숙박업이나 도소매업ㆍ건설업 등 경기 민감업종의 신용위험도가 크게 올랐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이들 업종의 대출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김포 풍무공단의 한 중소기업 사장은 "내수 중소기업들의 동산담보대출이 늘었는데 역으로 돈을 빌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금융지주의 한 고위관계자도 "당국은 물론 은행의 최고경영자들 역시 건전성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용위험도가 높은 업종에 대출을 늘리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ㆍ4분기 도소매업, 숙박ㆍ음식업의 대출은 3,229억원이나 감소했다. 반면 전자부품ㆍ컴퓨터ㆍ영상ㆍ통신장비 등 수출이 많은 분야의 대출은 1,907억원이 늘었다. 금융감독 당국이 부동산ㆍ임대업이나 도ㆍ소매업, 숙박ㆍ음식업 등 대출 집중 업종을 중심으로 관리해나가겠다고 밝힌 영향도 컸다. 더욱이 최근 정책금융기관이나 은행권은 수출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을 지원하는 대책을 내놓고 있다. 정책금융기관의 한 고위관계자는 "경기침체의 상황을 수출로 타개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정부 내에서 강하다 보니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