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래 최악의 경제 여건에서도 꿋꿋하게 고공행진을 이어오던 일본 엔화가 동북 대지진의 영향으로 드디어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대지진 직후 2차 대전 이후 최고 수준인 달러당 76.25엔까지 치솟았던 엔화 가치는 이달 들어 가파른 하락세로 돌아서 지난해 9월 이후 처음으로 달러당 85엔대로 진입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엔화가 지난해와 비교하면 아직 높은 상태지만 앞으로 전개될 국제 금융시장 여건을 감안하면 지금이 2008년 이후 3년 만에 도래하는 '신(新) 엔저시대'의 서막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앞으로 엔화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올 4ㆍ4분기에는 달러당 90엔대에 진입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스위스 UBS은행도 올해 말 엔화 전망을 기존의 달러당 85엔에서 90엔으로 조정하면서 내년 말에는 엔화 가치가 달러당 100엔까지 하락할 것이라며 2008년 이래 처음으로 '1달러=100엔'을 넘나드는 본격적인 엔저 시대를 예고했다. 엔화는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발 금융위기 직전 달러당 105엔 수준으로 약세를 보였다가 위기 이후 3년여 동안 추세적으로 강세를 유지해왔다. 미국,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일제히 금융완화 정책에 돌입한데다 투자자들의 안전자산 선호 추세가 뚜렷해지면서 엔화는 일본의 경기침체와 막대한 재정적자, 정치적 불안이라는 온갖 악재에도 끄떡없는 강세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지난달의 일본 대지진은 이 같은 외환시장의 흐름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WSJ는 "지난 수 년간 어떤 부정적인 요인에도 강세를 지속하며 '테프론 통화(Teflon currency)'라 불리던 엔화가 마침내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됐다는 견해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엔저시대의 개막을 예고하는 요인 가운데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일본과 세계 주요국의 경기 회복 속도 및 그에 따른 금리 차이다. 일본은 대지진 여파로 경기침체가 불가피한데다 피해복구 과정에서 제로금리 유지 및 추가 금융완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반면 유럽과 신흥시장 주요국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해소하기 위한 금리인상에 돌입했고 미국도 조만간 양적완화 정책을 마치고 출구를 모색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경기회복으로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저금리의 엔화를 팔고 고금리의 해외자산에 투자하는 엔캐리 트레이드가 다시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지진 피해와 전력부족으로 제조업체의 생산중단이 이어져 당분간 일본의 수출감소는 불가피한 반면 피해 복구 과정에서 원자재 수입은 크게 늘어나면서 막대한 흑자를 유지해온 일본 경상수지를 크게 악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경상수지 악화는 엔화 가치를 더욱 떨어뜨리고 이는 다시 경상수지를 악화시키는 연쇄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악셀 메르크 머크인베스트먼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일본의 복구 노력이 추가적인 엔화 약세를 유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