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영혼과 마주친듯" 자전적 작품 많아 마치 그의 인생에 끼어든 느낌
쉴 틈이 없던 차에 피카소 전시회를 관람할 기회가 생겼다. 명화가(名畵家) 피카소와 만날 수 있다니…. 그 소중한 순간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영화 두 편을 동시에 촬영하느라 진이 빠진 내게 피카소전은 마치 일종의 비타민 같았다.
발레를 전공하고 국립무용단에서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배우로 전업한 나는 누구보다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용에 한정된 것이어서 타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전시회 등을 가도 전문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식으로 감상한다. 사실 피카소의 그림은 학창시절 교과서 등에서 접한 것들이 많아 솔직히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미술관에 들어서자 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단 규모면에서 압도를 당했다. 유화 60점, 판화 50점, 종이작품 30점의 작품들이 전시실을 채우고 있었다. 마치 그의 영혼에 맞딱트린 느낌이었다. 특히 그의 사생활, 특히 그의 여자들과 관련된 그림들을 본 뒤 다소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가 그림만큼이나 여자를 좋아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현실에 기반한 그림들을 보며 내가 피카소의 일생에 끼여든 듯 했다. 또 그의 애정과 애증이 교차한 작품들을 통해 사랑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전시회를 도슨트(해설자)의 도움을 받아 감상할 수 있었다. 초기작으로 알려진 ‘솔레르씨 가족’은 세계적으로도 몇 번 전시되지 않은 고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초창기 독창적 화법의 시도라는 청색시대의 ‘솔레르씨 가족’에서 피카소도 처음에는 남들처럼 정물화법을 사용해 그린 점이 특이했다. 그림에 감도는 푸르스름한 색 때문인지 우울하게 느껴졌다. 청년 피카소의 고뇌가 느껴지는 듯 했다.
피카소는 다른 화가들보다 자전적인 그림, 특히 인물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전시작들은 삶의 축을 이뤘던 7명의 여인들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 피카소가 자신의 여인들에 대한 단상을 옮긴 그림 중 어느 것은 정말 아름답고, 어느 것은 추해 보였다. 이혼에 합의하지 않는 첫 부인 올가 코크로바에 대한 미움을 각지게 표현했다거나 노년에 활력소가 됐던 마리 프랑스와즈 질로는 예쁘게 그린 점을 보아 피카소는 감정에 충실한 화가였을 것 같다.
차례로 전시실을 돌면서 나는 피카소의 생애에 조금씩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관람이 무르익을 무렵 걸음을 옮기던 나를 멈추게 한 작품이 있었다. 바로 질로와의 사이에서 난 딸 팔로마를 그린 ‘검은 바탕 위의 팔로마와 인형’이었다.
검은 색연필을 가지고 작업한 이 판화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딸아이의 모습을 실제처럼 그려냈다. 큰 눈을 똑바로 뜬 채 인형을 품에 안아 만지작거리는 팔로마의 통통한 손가락과 벌름거리는 코, 앙 다문 입 등 자세하게 묘사된 표정에서 부성애(父性愛)가 그대로 전해졌다. 또 이 아이가 훗날 세계적인 보석회사 티파니의 디자이너 ‘팔로마’가 됐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내가 즐겨 착용하는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여기서 만나다니… 신기함이 느껴졌다.
또한 지문으로 그린 ‘팔로마와 끌로드’도 감동적이었다. 피카소는 네 명의 자식 중 팔로마와 끌로드만을 작품화했다. 노년에 얻은 자식에 대한 사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80세의 피카소는 다작으로 유명하다. 생의 촛불이 다하고 있는 걸 안 걸까. 그는 오히려 말년에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유명세를 더했다. 생애 무려 5만여점 점에 이르는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
마지막 전시실의 벽에 새겨진 피카소 어록은 17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 주연을 맡은 나의 마음가짐을 다시 바로잡게 만들었다. ‘나는 어린 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그처럼 나도 ‘배우로 살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싶다’라고. 나도 열정과 정열이 넘치는 배우로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