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2008년 이후 줄곧 지지율 1위… 한국 첫 女대통령 꿈꾼다

■ 박근혜 새누리 대선후보 확정 - 대통령 딸에서 대통령후보 되기까지

1. 대통령 딸로 유조선 진수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1969년 6월 현직 대통령의 큰 딸로서 세계 최대 유조선인 '유니버스코리아'호의 진수식에 참석한 후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2. 엄마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 -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시절인 1975년 10월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3군 장병을 열병하고 있다.

3. 평양서 김정일과 회동 -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이 2002년 5월 방북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기념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4. 이회창 대선후보 유세 지원 - 2002년 11월 경남 창원 대선 유세에서 당시 신한국당 대선 후보인 이회창 후보와 함께 엄지손가락으로 기호 1번을 가리키고 있다.

5. 이명박 대선후보 당선 축하 - 한나라당 경선에 나섰다 패배한 2007년 8월 이명박 대선 후보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9살때 청와대 들어와 아버지 박정희 피격후 비판 시달려

"위기의 대한민국 구하자" 이회창 고문으로 정치 입문


2007년 경선서 이명박 후보에 져 한때 대권 꿈 접어

당 위기때마다 선거 승리 이끌어… '선거의 여왕' 별명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61년의 인생 전부를 정치인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9세이던 지난 1961년 아버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ㆍ16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의 딸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1974년 23세 때는 어머니 고 육영수 여사의 뒤를 이어 5년간 퍼스트레이디이자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살았다.

이 시절 박 후보는 매일 아침밥상에서 박 전 대통령과 정치ㆍ사회 현안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박 후보는 이 시기 비판적인 시중 여론을 아버지에게 전달하거나 차지철 경호실장 등 일부 측근을 해임하라고 건의했고 박 전 대통령도 심중에 둔 후계자를 박 후보에게 귀띔했다. 그래서 박 후보가 최근 토론 등에서 5ㆍ16을 쿠데타로 지적하자 거부감을 드러내는 배경에는 누구보다 박 전 대통령의 심중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따라붙었다.

1979년 10ㆍ26 사태로 아버지를 잃은 후부터 그는 비로소 권력의 속성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청와대를 나온 후 18년간 그는 박 전 대통령 측근으로부터 비판에 시달렸다. 박 후보 스스로 이때를 "저와 아버지가 함께 매도당하던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현재도 논란이 되는 고 최태민 목사를 만난 때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과 인연이 있던 영남대 이사장, 근화봉사단 회장,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다. 야권이 '대선 주자 박근혜'의 주요 검증 대상으로 삼는 경력이다.

박 후보는 IMF 외환위기 사태가 일어난 1997년 대통령선거를 통해 정치권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그는 정치참여에 대해 '아버지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대로 흔들리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서라고 밝힌 바 있다. 정치인으로서는 젊은 45세의 나이지만 그는 당시 이회창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고문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 후보는 대선에 졌지만 박 후보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졌다. 기세를 몰아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그는 대구 달성군에서 역전 승리한다. 이후부터 그는 대부분의 큰 선거에서 승리하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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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권을 중심으로 충청과 강원 등 비수도권 중장년층 여성으로부터 애정 어린 지지를 받았다. '비운의 공주' 이미지가 강했지만 2002년 이회창 총재의 당 운영형태를 제왕적이라며 당을 박차고 나가면서 개혁적 정치인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박 후보가 본격적으로 대선에 도전한 것은 2007년과 올해지만 2002년 대선에서도 그는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다. 당시 유력 주자로 부상한 정몽준 전 대표와 연대가 추진되기도 했지만 정 전 대표 측근과 박 전 대통령의 악연 때문에 막판 박 후보가 거절했다.

박 후보가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을 장악한 것은 2004년 '차떼기 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당의 대표가 되면서이다. 기업으로부터 대선자금을 차로 실어 날랐다는 차떼기 사건에 이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탄핵으로 당시 한나라당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박 후보는 당사를 국가에 헌납하고 천막을 치고 지내면서 유권자에 표를 호소했고 4·15 총선에서 개헌 저지선인 121석을 확보했다.

그는 2006년 지방선거 지원유세 때 커터칼로 얼굴을 가격당했지만 병원 이송 뒤 첫마디가"대전은요?"라는 게 알려지면서 지지세가 더욱 커졌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당의 유력 대선 주자로 부상한 그는 그러나 실용주의를 앞세운 이명박 대통령에게 간발의 차이로 밀려 대권의 꿈을 접는다.

그러나 2008년부터 현재까지 박 후보는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렸다. 그동안 대선 주자 가운데 지지율 1위를 유지했으며 청와대 못지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자연스럽게 박 후보와 이 대통령 간 마찰도 이어졌다.

18대 총선 공천에서 친박계 인사가 대거 낙천하자 박 후보는 '국민도 속도 나도 속았다'고 공격했다. 박근혜라는 이름을 앞세운 정당인 '친박연대'가 생겨나고 이들과 친박 무소속 연대에서 친박계 낙천 인사 상당수가 생환했다.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재보선 패배 후 당이 위기에 몰리자 그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전면적인 쇄신을 이끌었다. 그 결과 새누리당은 4ㆍ11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했다. 그러나 공천 과정의 금품 수수 의혹이 불거지며 타격을 입은 채 박 후보는 21일 대선 주자로 선출됐다.

그는 인생에서 마지막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4개월 후인 12월19일 그가 선거의 여왕으로 머물지, 그가 평소에 롤모델로 언급해온 엘리자베스 1세로 등극할지 국민들은 주목하고 있다.


임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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