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중순 핀란드 국회 회의실에서 미래상임위원회 위원장인 마우라 티우라(오른쪽) 의원과 위원회 멤버인 지르키 카스비 의원이 핀란드의 중장기 성장 전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형욱기자 |
|
지난 1917년 독립하기까지 12세기부터 무려 800년 간을 스웨덴이나 러시아의 점령을 받았던 핀란드는 북유럽의 약소국이었다. 60년 1인당 국민소득(GDP)은 1,166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핀란드의 1인당 GDP는 3만3,500달러를 기록했다. 40여년 만에 3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핀란드는 현재 산업 클러스터와 정보기술(IT) 산업의 종주국으로 혁신의 산실로 인정받고 있다. 취임 초부터 ‘혁신’을 강조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방문했을 정도다. 북유럽의 강소국으로 거듭난 비결은 무엇일까.
◇‘사우나 정치’로 경제위기 탈출=90년대 초 핀란드 경제에 위기가 찾아왔다. 옛 소련이 무너지면서 수출이 급감했고 금리상승과 자산가치 붕괴로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했다. 특히 최대 저축은행이던 스코프뱅크가 지급불능 사태에 빠지면서 금융 시스템 전체가 흔들렸다. 경기는 급속히 둔화됐고 대외신인도도 급락했다. 90년 3.4%에 불과했던 실업률은 94년 불과 4년 만에 16.6%로 치솟았다.
이 같은 위기상황을 극복한 것은 정치적 리더십이었다. 핀란드 정부는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야당은 물론 기업ㆍ노동단체들도 동참시켜 국가발전 전략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페나 우리릴라 핀란드경제인연합회(EK) 이코노미스트는 “당시 정부와 각 정당, 노사 단체들이 토론과 협상을 벌여 정보통신기술(ICT) 분야가 경기위기 극복의 탈출구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며 “노조는 임금동결과 파업 자제를, 기업은 경영혁신을 약속했다”고 설명했다.
또 정부는 정책 효율성 향상, 경쟁적인 시장환경 구축, 연구개발(R&D) 지원 등에 나섰다. 2003년 국제경영개발원(IMD) 보고서에 따르면 핀란드는 정부정책 투명성, 벤처자본의 유용성, 금융기관의 투명성, 기업ㆍ대학 간의 기술이전 등 19개 분야에서 국가경쟁력 1위를 차지했다.
노사간, 정당간 갈등은 핀란드 특유의 사우나 문화로 해결했다. 국회 소속 미래상임위원회의 지르키 카스비 국회의원은 “당시 ICT를 집중 육성하는데 이해관계가 저마다 달랐다”며 “이 때문에 공개적인 토론보다 ‘사우나 정치’를 통해 암묵적인 공감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는 노키아라는 세계적인 기업의 배출이었다.
◇정부는 환경조성에만 주력=핀란드 정부가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차세대 성장동력 발굴을 주도했지만 시장에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릴라 이코노미스트도 “혁신의 근원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기업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특정 산업이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직접 지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직접적인 자금 및 기술 지원은 오히려 기업이 경쟁력을 높일 수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핀란드 정부는 산업보조금 지원은 최소화하는 대신 이공계 인력 양성, 노사안정, R&D 지원 강화, 산-학-연 클러스터 조성, 공기업의 자율경영 확대 등 시장친화적인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페카 율라 안틸라 핀란드경제연구소(ETLA) 연구담당 이사는 “가장 중요한 정부 역할은 교육 시스템 정비와 노사관계 안정이었다”며 “시장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최대한 시장 자율에 맡기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교육 및 인력양성이 가장 강조하는 부문이다. 마우라 티우라 국회 미래상임위원회 위원장(국회의원)은 “사실 20년 뒤 어떤 산업이 유망한지는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며 “생명과학 등 특정 분야가 급성장하면 즉시 인력을 공급하도록 유연한 교육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중장기적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 신뢰성을 확보했다. 티우라 의원은 “4년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고령화와 노동력 부족, 기후변화협약 등 변화되는 환경에 맞춰 30년ㆍ40년 뒤 미래 계획을 다시 내놓는다”며 “노사ㆍ학계 등 광범위한 의견수렴을 거치기 때문에 근본 틀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가령 노키아 임원은 총리 직속기구인 과학기술정책이사회(VTTN)나 중장기 국가비전인 ‘핀란드 인 2015’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국가 발전을 좌우할 미래 성장동력 발굴이 정치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는 지역 혁신도시나 산업클러스터를 국토균형발전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참여정부가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고령화, 추운 기후 등 약점을 기회로=물론 핀란드가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질적인 청년실업 해소와 인구 고령화에 대비한 연금개혁 문제가 대표적이다. 또 우수 R&D 인력은 많지만 마케팅이나 기획 관련 인력은 부족해 신기술을 개발해놓고도 상업화에 애를 먹고 있다.
노키아 등 IT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 환경변화에 너무 취약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카스비 의원은 “책상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꼴”이라고 설명했다. 핀란드가 ‘제2의 노키아’ 발굴을 위해 신수종 산업으로 선정한 분야는 바이오ㆍ환경ㆍ헬스케어 등이다.
이 가운데 고령화로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비가 급증할 것에 대비해 생명공학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게 눈에 띄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바이오, 신약ㆍ장기 분야를 육성하고 있지만 고령화 사회 대비가 아니라 단기간 내 제품화에 주력하고 있는 게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핀란드는 특히 환경 관련 산업에 기대를 걸고 있다. 추운 날씨 탓에 에너지 절감 산업 및 기술이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800년 간의 식민지 경험을 딛고 선진국으로 도약한 핀란드인들. 그들은 고령화, 혹독한 추위 등 약점을 오히려 기회로 삼으려는 또 하나의 실험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