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의 한 프라이빗뱅킹(PB)센터 지점장은 최근 한숨이 부쩍 늘었다. 자산가들의 예금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줄잡아 5%가량이나 줄어든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이를 만회하기가 도통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자산가들은 단순히 금리만을 보고 PB를 찾지 않는다. 돈 많은 고객들에게 PB는 가족 전체 자산의 상담자다.
이 지점장이 힘들어하는 실제 이유는 바로 한달여 전에 시행된 금융실명법 개정안의 여파가 생각보다 커서다. 이 지점장은 "지난해 상반기 해외계좌납세순응법(FACTA) 시행에 이어 한달 전 강화된 금융실명법 시행까지 맞물리면서 자산가들의 예금이 줄어드는 상황"이라며 "당시 현금이나 수표로 인출해 간 자산가들이 꽤 되며 자금출처를 꺼리는 이들이 많아 예금을 유치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4일 금융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9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금융실명법 개정안이 한달여가 조금 지나면서 시중은행 PB들의 고충이 커지고 있다.
세원노출을 꺼리는 자산가들의 예금 감소는 물론이고 강화된 처벌규정 때문에 고객들에게 요구하는 문건이 많아지자 고객들의 항의가 늘어나면서 이를 받아주는 것 자체가 큰일이 됐다.
일선 PB센터의 경우 금융실명법 시행 이전만 해도 자녀 명의의 예금을 가입할 때 부모가 대신 와도 됐지만 이제는 가족관계증명서나 인감증명서 등을 첨부한 위임장을 들고 오거나 자녀가 직접 오도록 하고 있다.
또 불법·탈법 차명거래금지 설명확인서를 상품을 계약할 때 반드시 받도록 해 고객 불편이 늘었다.
강길원 하나은행 압구정 PB센터 지점장은 "금융실명법 개정안과 관련해 차명계좌 개설로 분류될 수 있는 부분은 원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며 "이와 관련해 고객들에게 충분히 설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흥영 신한PWM 파이낸스센터 팀장은 "은행원들에게 다가오는 위험도가 있기 때문에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확실하게 점검하고 있다"며 "대부분 고객이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만 많이 불편해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특히 자녀 몰래 자녀 명의의 상품을 가입하려는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시중은행 PB센터들은 당장의 예금 유치보다는 강화된 처벌규정이 훨씬 더 신경 쓰인다는 입장을 나타낸다.
개정된 금융실명법은 불법재산 은닉이나 자금세탁 등의 불법 목적으로 차명거래를 하거나 이를 중개한 금융회사 종사자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관련 법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을 경우 금융업 종사자에게 부과되는 과태료도 종전 5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대폭 늘었다. 불법 차명거래에 대한 공소시효가 없어지고 차명계좌가 발견될 때마다 매번 건당으로 처벌 받도록 해 법망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시중은행 강남지점의 한 PB는 "가족 간의 거래 등에서 일일이 문건을 요구할 경우 장기간 거래해온 고객들이 '융통성이 없다'는 식의 핀잔을 줄 때가 있다"며 "그래도 혹시나 모를 경우를 대비해 고객에게 꾸준히 설득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개정된 금융실명법에 따른 처벌 사례가 아직 없어 '절세'와 '탈세'를 명확히 구분 짓기 힘든 부분 또한 시중은행 PB들의 고충을 더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상황들이 금융실명법 시행 초기에 나타나는 단기 현상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금융권에서 빠져나간 자금이 부동산 등의 실물자산에 또다시 투입될 경우, 어차피 국세청 등 금융당국의 레이더망을 피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중은행의 한 PB사업부 담당 임원은 "일시적으로 자금이 줄어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정 수준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늘고 있다"며 "금융실명법 시행이 안정 단계에 이르면 몇몇 지점에서 빠진 자금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또 다른 시중은행 PB사업부 담당 임원도 "시중은행들이 복합점포를 늘리며 PB 사업부를 강화하려는 것은 금융실명법 개정안 등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자산가들과 관련한 시장의 성장세를 높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밝혔다.
실제 자산가들이 혹시나 모를 처벌을 우려해 합법적으로 자금을 운용하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시중은행 PB들은 금융실명법 개정 이전부터 면세 한도 내에서 증여를 하고 나머지 자금은 본인 명의로 돌리는 식의 자금 운용을 권해 왔다. 시중은행 강남지점의 한 PB는 "자산가 일부는 자식이나 배우자 앞으로 넣어둔 예금은 그대로 둔 채 며느리나 사위, 형제 명의 앞으로 예치해 놓은 자금은 분쟁 소지 방지 차원에서 본인 명의로 돌려놓고 있다"며 "돈을 떼일 가능성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금융소득종합과세를 내고 예금을 보유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차명계좌의 원주인이 갑자기 사망해 계좌의 실소유주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들려오고 있다"며 "이러한 사례가 늘어날 경우 자산가들이 본인 명의 계좌로 돈을 보유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