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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로 솟아오른 봉우리, 분명 우리 소나무에 해와 달, 꽃과 새가 있는 풍경이다. 학을 타고 신선이라도 지나갈 듯한. 하지만 거부감이 드는 것은 이 모든 게 컴퓨터그래픽(CG)과 사진으로 조합된 작품이라는 점. 게다가 백일사진 액자처럼 번들번들하게 코팅처리까지 했다. 임택 작가의 '옮겨진산수유람기' 시리즈 중 하나다. 다른 그림엔 유채꽃처럼 노란 하늘에 당구공처럼 흰 해가 뜨고,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도 등장한다. 그간 한국화하면 수묵화, 한지 위의 검은 선과 여백의 미학으로 알아왔다면 낯선 감을 지울 수 없다.
문화역서울284가 올해 첫 기획전인 '한국화의 경계, 한국화의 확장' 전시를 열고 있다. 서정태·이강소·함섭 등을 비롯한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29명의 작품 12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전통적인 한국화를 비롯해 서양화·사진·설치미술 등 다양한 시각예술 분야의 작가가 '한국화의 정신'이라는 주제로 모였다.
세계 미술의 큰 흐름 속에서 한국화의 한계와 경계, 미래를 동시에 고민하는 작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화, 혹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모범답안은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중국·일본·인도 등 아시아지역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 고유의 회화, 시각예술 양식 정도가 최선. 이번 전시는 이런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현재 박물관에 있는 물건들이 당대에는 실생활에서 쓰이던 물건이듯, 지금의 새로운 시도가 미래에 전통적인 무엇으로 자리할지 여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전시 총감독이자 작가로도 참여한 우종택 인천대 교수는 "우리 시대에 한국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한국화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변"이라며 "한국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신이 경계를 넘어 확장될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120여 점의 작품이 모두 고민만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꽃 핀 나무 위에 앉는 새를 그린 김선두의 '어느 봄날'은 그래도 익숙한 한국화에 가깝다. '소와 아이들'(오태학), '기억의 풍경 - 함피'도 마찬가지. 조금 더 나아가면 곽훈 작가의 도자기 작품 'Pouring(쏟아지는)'. 언뜻 버섯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사발에서 물이 쏟아지는 모양을 통째로 표현했다. 정경화의 '농필(弄筆)-별이 빛나는 밤에'는 아예 여백 없이 먹으로만 밤을 그리고 그 사이 반짝이는 금빛이 비친다.
그래도 다양한 방식의 '한국적인 것'을 담은 작품이 더 많다. 김선형의 영상설치작품 '구름'에서는 가로로 납작한 틈새 화면으로, 저 끝 벽면에 구름이 움직이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김호득의 설치작품 '공기 점' '굳혀진 공기 손'은 먹물들인 한지를 주먹으로 뭉쳐 바닥과 벽면에 늘어놓았다. 또 서정태의 '푸른초상' 연작은 왜곡된 인체 비례로 표현된 욕망과 꿈을 한지(장지)에 그렸다. 송수련과 오숙환은 수묵 추상화, 우종택은 그을린 소나무 둥치를 활용한 설치작품이다. 전시는 4월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