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김대중 정부 시절 유력 정치인의 대화 내용이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국정원 도청 테이프를 확보하면서 검찰 수사가 새로운 국면을맞고 있다.
감청장비를 통한 불법감청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던 수사가 국정원 차원의 조직적 정치사찰 및 도청 테이프를 활용한 정치적 뒷거래 의혹 규명 쪽으로 급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테이프는 유력 정치인으로 추정되는 인사들을 도청 대상으로 삼았다는점과 외부로 유출된 뒤 오랜 기간 가정집에 보관됐다는 점에서 안기부의 도청 `악습'이 국정원에서도 계속됐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보여진다.
정권 교체로 집권한 김대중 정부가 초창기 국정원에 대해 대대적인 개혁의 칼을휘두르며 정치사찰 금지 등을 목표로 조직 재정비에 나섰음에도 도청은 여전히 근절되지 않았던 것이다.
국정원 개혁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세력이 불법 감청을 계속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어 향후 검찰 수사는 국정원의 전반적인 도청 실태와 보고 라인 등에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예상된다.
◇ `국정원 도청테이프' 있었다 = 국정원은 안기부 도청 파문이 불거진 뒤 두차례 자체 진상 조사를 통해 일부 도청 사실을 시인했지만 도청 대상과 관련기록 관리 방법은 일절 설명하지 않았다.
전직 국정원장들은 도청 의혹을 완강히 부인하며 국정원이 합법 감청과 도청을구분하지 않고 서둘러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이 국정원 압수수색을 통해 `R-2', `카스(CAS)' 등 감청장비를 개발한 정황과 사용 내역을 일부 확인한 데 이어 이번에 불법 감청을 입증할 테이프까지확보함에 따라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완전히 잃게 됐다.
국정원은 감청 장비를 주로 대공업무나 산업 스파이, 마약 밀매 등과 관련해 법원의 영장을 받아 합법적으로 사용했다고 해명했지만 이번 테이프 압수로 정치권 등에서 끊임없이 의혹으로 제기됐던 정치 사찰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게 됐다.
이 테이프가 도청 이후 이른 시일내에 폐기되지 않고 외부로 유출된 뒤 상당 기간 보관돼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다른 테이프의 추가 유출 가능성이나, 도청 테이프를 이용한 뒷거래 의혹도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정권의 실세 인물들이 국정원에 불법 개입해 도청을 배후조종했을 수 있다는 의혹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 수사 방향 급반전…책임자 사법처리 불가피 = 검찰은 최근 수사 상황에 대해`카스' 관련 불법 감청은 아직 수사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며 의외로 더디게 수사가 이뤄지고 있음을 내비쳤다.
`R-2'나 `카스' 등 국정원 감청 장비의 존재를 확인한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수사가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해 돌발변수가 생긴 게 아니냐는 의심을 갖게했다.
검찰이 최근 국정원 전직 국ㆍ과장들을 무더기로 소환 조사하기 시작한 것도 이같은 추론을 뒷받침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도청테이프를 압수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모든 의문은 크게 풀렸다.
검찰이 국정원의 도청 실태를 조사하는 게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도청장비를활용한 수사를 잠시 보류했던 것이다.
도청 수사 초기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았던 서울 시내 유명 한정식집 주인과 종업원들도 최근 잇따라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어 국정원의 `미림팀'식 도청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검찰은 현재 전직 국정원 국ㆍ과장들을 상대로 본연의 임무가 아닌 부분에 대한도청을 누가 지시했는지, 추가로 테이프를 외부에 유출하지는 않았는지, 테이프 존재를 어느 선까지 알고 있었는지 등을 집중 추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이르면 이번 주중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장, 국내 담당 2차장을 지냈던 인사들을 소환 조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검찰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청 근절 지시에도 불구, 복잡한 정치적 역학구도를 갖는 정권교체기에 외부 인사가 도청을 지시했거나, 국정원 개혁에 불만을 가진직원들이 `보험용'으로 도청을 했을 가능성도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를 통해 도청을 지시했거나, 감청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외부에 유출한 사실이 확인되면 당사자들에 대한 처벌이 가능할 것으로 관측된다.
국정원은 2002년 3월 이후 R-2, 카스를 모두 폐기했다고 밝혔지만, 개정전 통신비밀보호법의 공소시효(5년)를 적용하더라도 2000년 9, 10월 이후 도청이 이뤄졌다면 사법처리에 문제가 없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어쨌든 도청 테이프의 존재로 정치 사찰과 추가 유출 가능성이 확인돼 안기부가국정원으로 개편된 이후 저질러진 불법 감청과 도청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검찰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될 전망이다.
(서울=연합뉴스) 법조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