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금융시장이 붕괴 위기에 처한 가운데 유럽연합(EU)이 대응책 마련에 돌입했다. 그리스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이탈에 이어 스페인마저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역내 은행에 미리 방화벽을 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로이터는 EU집행위원회가 '유럽 은행 통합 구제안'을 이미 마련했으며 이를 다음달 6일 공식적으로 회원국에 제안할 예정이라고 29일(현지시간) 구제안 초안을 입수해 보도했다.
전체 156쪽에 달하는 이번 구제안의 핵심은 유럽 각국의 은행 청산기금을 한데 묶어 공동 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페인 은행에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이 일어날 경우 영국의 자금으로 지원에 나서는 식이다. 구제안이 실현되면 유럽 금융권이 '은행연합(banking union)'으로 나아가는 중대한 첫걸음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로이터는 평가했다. 은행연합이 설립되면 EU는 기존의 통화동맹에 이어 금융동맹 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구제안은 또한 각국 은행 예금의 1%를 떼어내 위기 대응 자금을 조성하는 한편 은행 부실을 감독할 수 있는 별도 기관을 설립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구제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EU 27개국이 모두 찬성 의견을 내야 하는데 막상 돈줄을 틀어쥔 독일과 영국은 이러한 방안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아 도입 가능성이 불투명하다. 설령 반대가 없더라도 이런저런 법적 절차를 모두 거치면 일러야 오는 2014년에나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에 당장 발등에 떨어진 위기를 해소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EU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초고강도 은행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 이유는 재정위기의 불길이 그리스를 거쳐 스페인마저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10년물 국채금리가 디폴트(채무 불이행) 마지노선인 7%를 위협하고 있는데다 독일 국채와의 금리 격차(스프레드)가 500bp(1bp=0.01%) 이상 벌어져 자국 은행 구제에 필요한 자금마저 확보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실제로 스페인 정부는 지난 26일 자국 3위 은행 방키아에 190억유로(28조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한다고 발표했으나 막상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방키아에 현금 대신 국채를 지급하고 이를 담보로 방키아가 유럽중앙은행(ECB)에서 돈을 빌려 오는 계획을 추진했다. ECB가 개별 정부에 직접 자금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EU 조약을 우회하는 '꼼수'를 동원한 셈이다. 하지만 ECB는 이런 우회 지원을 거절해 스페인 정부는 가뜩이나 불안정한 국채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할 처지다.
일각에서는 스페인이 EU를 상대로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 4위 경제대국인 스페인이 디폴트를 선언하면 유로존이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가 자국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벼랑 끝 전략을 쓰고 있다"고 이날 지적했다.
실제로 라호이 총리는 3월 이후 중단된 ECB의 국채 매입을 재개해주거나 유로안정화기구(ESM) 자금을 은행 구제금융에 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FT는 이와 관련해 그리스나 아일랜드ㆍ포르투갈 등의 사례를 보면 해당국 국채와 독일 10년물 국채의 스프레드가 500bp 이상으로 벌어진 뒤 모두 한 달여 안에 예외 없이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며 스페인도 이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