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22년 전인 1993년 6월 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충격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읽게 된다. 훗날 '후쿠다 보고서'로 불리게 된 56페이지 규모의 문서 안에는 삼성전자 경영 문화 전반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삼성전자 정도의 회사에 디자인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 보고서의 골자였다. 이 보고서를 정독한 이 회장은 격노해 삼성전자 임직원 200여명을 프랑크푸르트로 긴급 소집한 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는 '신경영'을 선언하게 된다.
후쿠다 보고서를 작성해 삼성 혁신의 기폭제가 됐던 후쿠다 타미오(사진) 전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이 삼성에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조언을 쏟아 냈다.
신경영을 통해 이룬 성과는 이제 모두 잊고 '리셋(reset)'에 나서지 않으면 삼성의 미래는 없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실제로 현재 삼성 내부에서는 '제2의 신경영' 선언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상당한 위기감이 흐르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실적 대반전을 이끌어 낼 것으로 예상됐던 스마트폰 갤럭시S6의 판매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2·4분기 영업이익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는 분위기가 시장을 중심으로 감지되고 있고, 지배구조 개편의 '화룡점정'이었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아 안갯속으로 빠져들었다.
삼성이 맞이한 절체절명의 상황에 대해 후쿠다 전 고문은 "삼성인 전부가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하게 조언했다.
그는 11일 삼성 사내망인 미디어삼성과의 인터뷰를 통해 "삼성이 미래에 어떤 기업으로 거듭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때만 해도 사원 수도 적고 기업규모도 크지 않아 혁신이 상대적으로 쉬웠지만 이제는 회사가 몰라볼 정도로 커져 혁신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삼성은 이제 글로벌 톱 기업으로 올라섰기 때문에 더 이상 목표로 삼을 기업이 없다"며 "선구자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대단히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은 이제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기업이라는 얘기다. 그는 아예 업종을 바꿔 새로운 영역에서 도전을 시작한 제너럴일렉트릭(GE)과 여전히 본래 주력 업종인 전자기기 분야에서 혁신을 모색하는 소니를 예로 들면서 "어느 기업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삼성도 결단을 내릴 시기가 온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 회장과 신경영에 대한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후쿠다 보고서를 본 이 회장이 '이런 일이 있었냐'"며 크게 화를 낸 뒤 임직원들을 소집해 굉장한 회의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당시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서울에 가면 돌을 맞을 수 있으니 한 두 달 간은 서울에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보고서와 관련 이 회장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일화도 소개하면서 "이 회장이 '삼성의 철학을 디자인에 담으라'고 지시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경영자는 일본에서도 본 적이 없다"며 "이 회장의 날카로운 질문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지만 신경영 선언 이후 10년 동안 매출이 30배 증가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 이 회장을 다시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이 회장에게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하면 좋을지 듣고 싶다"며 "이 회장은 항상 미래를 이야기했고 언제나 앞을 향해 있었다"고 추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