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셔틀외교'로 정상화됐던 한일관계가 위안부 문제에 부딪히며 급속하게 냉각되고 있다.
이 대통령은 18일 교토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발언으로 참석한 외교안보 참모들을 긴장시켰다. 이 대통령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에게 미래지향적 파트너십 구축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종군위안부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일본 총리에게 이렇게 길게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거론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강하게 할지는 몰랐다"고 이날 회담분위기를 전했다.
양국 정상들의 이날 회담은 '충돌'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앞으로 양국관계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안보 분야 협력(군사정보보호협정ㆍ군수지원협정) 등 현안들이 우리보다는 일본 측에 더 큰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지만 6자회담ㆍ북한비핵화 등을 고려한다면 한일관계 냉각은 우리 측에도 부담스럽다.
◇한일 정상 충돌 배경은=이날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가 일본 국내법이나 실무적 차원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만큼 노다 총리를 위시한 일본 정부가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임을 거듭 강조했다.
이에 대해 노다 총리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지혜를 낼 것"이라면서도 일본 국내 여론을 의식한 듯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비의 철거를 요구했다. 노다 총리의 이러한 반응은 이미 예상됐지만 평화비 철거까지 언급한 것은 이제까지의 외교관례에서 벗어난다. 노다 총리의 강경발언은 일본 극우파를 배경에 둔 정치적 발언으로 해석된다. 민주당 내에서도 극우성향인 노다 총리 입장에서 우익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위안부 문제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이번 정상회담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 또한 내년 총선ㆍ대선을 앞둔 정권 후반기에 국민적 관심이 쏠려 있는 위안부 문제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문제다. 특히 앞으로도 위안부 중재위 설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강화한 고교 교과서 문제 등까지 고려한다면 이번 기회에 위안부 문제를 명확하게 짚어줘야 한다는 것이 이 대통령의 판단으로 보인다. 결국 양쪽 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국내의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예상보다 강도 높은 설전을 벌인 것으로 해석된다.
◇앞으로 한일관계는=이날 정상회담 이후 악수를 나누는 이 대통령과 노다 총리의 굳은 표정은 향후 한일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특히 노다 총리가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전일 겐바 외상이 청와대 수석비서관(천영우 외교안보수석)에게 독도영유권을 주장한 것을 뒤늦게 밝힌 것은 충돌 이후 양국 정상의 감정적 앙금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이르면 다음달께 위안부 문제 중재위원회 설치를 제안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런 조치에 일본 측이 여전히 지연ㆍ무시전략을 구사할 것이라는 것이 외교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외교가 일각에서는 일본이 중재위 제안을 받으면서 독도 문제도 국제사법재판소 중재절차에 회부하자고 역제안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결국 과거사 문제로 한일관계는 당분간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냉각기가 어느 정도까지 갈지는 미지수다. 한일 FTA 등 양측 간에 걸린 현안들이 많기 때문에 양국 외교관계의 냉각기를 오래 끌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결국 양국 모두 경제ㆍ안보 현안을 무시하고 위안부 문제에 얽매여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에 일본 측이 사죄를 포함한 구체적인 성의 표시를 하고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는 방식의 물밑 협의가 계속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 측도 이번 정상회담에 일말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우리 대통령의 문제 제기에 대해 일본이 전혀 성의 없이 대응했다고 볼 수는 없다"며 "일본의 구체적인 변화가 없다면 한일관계에서 일본이 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위안부 문제가 계속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