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진달래 말고도 온갖 꽃들이 너울져서 봄바람에 한들거리는 봄이다. 거리거리마다 이름모를 꽃단지가 줄을 지었고 모퉁이는 모퉁이대로 백목련이 화사하다. 사람들은 온통 IMF병에 걸려 핼쑥해진 봄날에 꽃들만 신이 난 걸 바라보면서 인간사의 시름 따위야 가소롭다는 듯 낄낄거리고 있는 자연의 무심함이 얄밉기까지 하다.어찌되었든 봄은 괜찮은 계절이다. 러시아워의 숨막히는 사거리 복판에서도 꽃그늘만 흐드러져있으면 콧노래가 나온다. 실업자를 200만이나 보유한 우리 사회가 어지간히는 남루하게 보일것이지만 가지각색의 꽃빛이 그 남루를 가리고 있으니 그런대로 보아줄만 한 것이다.
꽃을 좋아하기는 어느 종족이나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그 의미를 부여함에 있어서 우리네처럼 강렬하고 정겨운 민족은 드물성 싶다.
먼 옛날 신라적 향가인 헌화가에서의 꽃 한송이는 이루지 못할 사랑도 맺어주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조선조 중종때의 강릉선비 박수량이 김정과의 작별을 아쉬워하여 철쭉꽃으로 지팡이를 엮어준 것은 길떠나는 친구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별의 슬픔을 달래는 것으로는 김소월의 진달래가 향기롭고, 전라도지방의 진달래 무덤은 총각이나 처녀로 죽은 고혼의 무덤에 꽃을 꺾어 바치는 진혼의식으로 여기서는 꽃이 외로운 영혼을 달래는 진혼신의 역할까지 도맡는다.
나아가서 한국의 꽃은 동맹신의 역할도 한다. 역시 남도지방의 죽란시사는 다산 정약용에서 지금까지 맥을 잇는 시인모임으로, 모이는 일시를 따로 정하지 않고 「복사꽃 필 무렵」이라던가 「국화꽃 필무렵」과 같이 철따라 꽃이 피고 지는 동안 만나서 동맹을 맺게 해주는 신명을 간직하고 있다.
뿐이랴. 옛 문헌을 훑으면 꽃과 마주앉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한 왕후장상들이 즐비하니 이것이 한국 꽃의 신명이고 꽃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흥과 멋이다.
무슨 꽃이건 꽃만 보면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하며 흥을 내고 멋을 부렸던 선인들이니 봄에 불어오는 동남풍을 꽃바람이라 이름하고 그 알싸하던 보릿고개의 와중에서도 화전놀이다 천렵이다 하며 겨우내 쌓아두었던 신바람을 풀어제쳤다.
그 꽃바람이 또다시 강산을 뒤덮어 온 천지가 꽃범벅으로 울긋불긋한 계절이다. 우리 선조들이 꽃바람을 맞으며 보릿고개의 시름을 달랬듯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흐드러진 꽃그늘을 찾아 꽃잎 속에 배어있는 신바람을 추스려 IMF를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여유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