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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병원에서 3개월에 한번씩 검진을 받고 있는 당뇨 환자인 김지석(53ㆍ가명)씨는 병원을 다녀올 때마다 기분이 상한다. 3개월 전에 미리 다음 진료시간 예약을 해놓지만 기본이 30분, 많을 때는 1시간 이상을 기다리고는 하기 때문이다. 장시간을 기다려 주치의를 겨우 보지만 진료시간은 3분에서 길어야 5분이다. 의사가 묻는 몇 개의 질문에 답하면 다음 환자를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혹여 궁금한 점이 있더라도 의사에게 질문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김씨는 "다른 좋은 당뇨약이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의사에게 얘기하려 했으나 기분 나빠 할까 봐 말도 꺼내지 못했다"며 "병원을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 돈 내고 제대로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다"고 하소연했다.
#. 관절염 환자 최모(65)씨는 지난해 인근 병원에서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이 붓고 통증이 생겨 병원을 다시 찾았다. 해당 병원에서는 수술 후의 단순부종이라고 설명했지만 다른 병원에 가본 결과 수술시 MRSA(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에 감염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대학병원으로 옮겨 염증 제거수술을 받았으나 인공관절 수술을 다시 받아야 할 처지다. 최씨는 수술을 한 병원을 상대로 의료소송 여부를 고민 중이다.
각종 첨단의료기기 등의 발전과 더불어 국내 의료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환자들이 실제 느끼는 의료 서비스의 만족도는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제약회사가 의사들에게 건네는 불법사례금인 리베이트 문제가 불거질 때면 항상 거론되는 것이 의약품 처방권을 갖고 있는 의사는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에게 있어 '슈퍼갑'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이다. 이는 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환자는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의사들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을'의 처지이다. 장시간 대기시간에 짧은 진료시간, 의사의 부족한 설명 등 비싼 의료비를 지불하면서 정작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는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이 환자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의료계의 불통과 환자를 고객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의료 서비스정신의 부족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안상윤 건양대 병원관리학과 교수는 "최근 국내 한 대학병원에 대한 현장조사 결과 설명 부족과 의사의 불성실한 태도 등으로 인한 환자들의 불만족도가 무려 80%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며 "병원들이 그들의 권위만 믿고 얼마나 의료소비자의 입장을 등한시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의료계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을 경제심리학적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만족과 불만족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구매의 효용(效用ㆍutility)으로부터 가장 크게 나타나는데 효용은 어디까지나 소비자의 주관에 달려 있다는 것.
따라서 환자들은 의료 서비스 구매에 따른 효용을 다른 서비스 구매에 따른 효용과 비교해 만족과 불만족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 상대적으로 호텔이나 레스토랑 서비스에 비해 비용 대비 효용이 상당히 떨어진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불만족이 누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안 교수는 "소비자들은 다른 서비스 분야에서는 왕 대접을 받는 데 비해 병원에서는 마치 짐짝 취급을 받기 때문에 이 비교인식이 불만족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불만족의 원인은 기능적 측면과 비기능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에 비해 기능적인 측면, 즉 진료기술 그 자체에 대한 불만족은 감소하는 추세지만 비기능적인 측면, 즉 의사의 태도나 친절, 설명력, 내부 분위기 등이 불만족의 원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즘에는 건강검진이 유행인데 의료소비자들은 검진의 정확성, 검진장비 상태, 검진기술의 숙련도와 같은 기능적인 측면보다 검진 가격, 실내 인테리어, 진단 요원들의 복장이나 태도와 같은 비기능적인 측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환자의 불만족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의대 교육과정 개편과 의료진의 커뮤니케이션 교육 등 환자와의 소통 강화를 위한 노력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안 교수는 "국내 한 대학에서 의과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레토릭지수, 즉 말을 할 때 불편감을 느끼는 지수를 조사한 결과 약 49% 정도의 의과대학생들이 사람들과 원만한 대화를 하는 데 불편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의과대학 교육과정의 개선이 절대 필요하며 현재 의료기술의 숙달 중심으로 돼 있는 의학교육을 환자 중심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대 교육과정에 단순한 의료윤리가 아닌 그보다 더 소비자 편에 서 있는 상도덕, 소비자심리, 환자 만족 방향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일반윤리, 봉사활동 등의 인문 및 인성교육이 추가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많은 대학병원에서 환자들의 대기시간이 길고 진료시간은 매우 짧은 것에 대해 의료소비자들의 불만도 크다. 전문가들은 이를 진료 전달 체계가 왜곡돼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감기 치료와 같은 경증환자도 종합병원이나 2차 대학병원으로 몰리다 보니 이런 병원에서 긴 대기시간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1차 진료기관인 의원급 의료기관 활성화를 위해 만성질환 동네의원 관리제 등 다양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대형병원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인식 때문에 개선이 쉽지 않다.
일각에서는 종합병원이나 2차 대학병원에서 최초로 경증환자를 치료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경증환자는 1차로 동내 의원이나 중소병원에서 진료하도록 하고 그곳에서 필요시 상급병원으로 보내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다.
또 병원 이용시 각종 의료사고나 안전사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도 가중되고 있다.
정부는 의료분쟁이 날로 급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창구로 지난해 4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출범시켰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따르면 지난해 4월부터 올 3월까지 1년간 접수된 상담 건수는 3만4,553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 평균 142건의 상담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는 상당한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의사 측이 동의해야 조정 절차가 성립된다는 규정 때문에 실제 조정에 들어가는 사례는 매우 적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실제 1년간 접수된 상담 건수 중 피신청인의 동의를 받아 조정 절차가 개시된 사례는 299건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조정신청에 의사 참여를 강제하거나 의료과실 입증책임을 환자가 아닌 의사가 지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대학병원들의 경우 원내 감염과 수술 오류 등의 병원 내 의료ㆍ안전사고를 줄이기 위해 사전에 여러 가지 항목을 체크해 '안전한 의료기관'임을 인증을 받는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 인증(JCI)'을 신청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