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아침, 떠나려는 단풍 꽁무니라도 잡아볼 요량에 소요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단풍이 한낮의 햇살을 받아 울긋불긋 온 산을 불태우고 있다. 산은 소요산(逍遙山)이건만 단풍은 어찌 저리도 소요(騷擾)로운지….
산 이름은 아마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왔을 터,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슬슬 거닐며 즐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소요(騷擾)란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나 어지럽거나 술렁거리고 소란스러운 데가 있다는 뜻이다.
안향··율곡도 거문고로 심성 수양
소요산에서 소요하며 소요스러운 단풍을 보노라니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병풍으로 두르고 국악의 향연을 누리는 듯 단풍잎 사이로 빗겨오는 바람 소리에 거문고 소리를 듣는다. 제각기 자태를 뽐내는 단풍은 형형색색이건만 온 산을 두르고 어찌 저리 아름다울까. 소요로움이 되레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누구 하나 저 잘났다고 우기지를 않으니 그야말로 태화(太和)의 도(道)가 구현된 것이라 소요로움조차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 송대 기철학의 완성자 장재(張載)도 “태화란 이른바 도”라고 했을 것이다. 위대한 조화가 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이후 선비들은 자연의 모습, 즉 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현실에 실현하고자 했다.
단풍의 산수병풍 속에서 국악의 향연을 연상하는 것은 아마도 제각기 성질을 달리하는 악기들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음악을 연출해내는 듣기 좋은 음악처럼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국악기에서도 도를 형상화한 악기가 있으니 바로 거문고다. 거문고의 제작원리를 따져보면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작은 우주다. 그래서 우리 옛 선비들은 “역(易)은 소리 없는 거문고요, 거문고는 소리 있는 역이다(이득윤의 ‘서계금명’)”라고 했다. 천지의 운행원리와 만물의 존재원리를 상징적으로 정리한 ‘역’은 음양∙오행∙삼재, 10천간과 12지지 등이 조화롭게 조직되면서 쉼 없이 흐르는 천지자연의 도를 표현한다. 그러니 거문고를 일러 모든 악기의 으뜸이라 부르는 것도 당연하고 도를 마음에 체현하고자 하는 선비의 벗이 되기에도 손색이 없다.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안향(安珦)도 거문고 한 벌을 비치해 두고 가르칠 만한 선비를 만날 때마다 권했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율곡 역시 제자들을 가르치며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심성을 수양하며 인성을 함양해 성인의 경지에 오를 것을 강조했다.
국민 내세우기 앞서 사욕 버리길
거문고를 뜻하는 한자 ‘금(琴)’에는 금지한다는 ‘금(禁)’의 의미도 담겨 있다. 거문고에는 우리 마음의 사특(邪慝∙요사스럽고 간사하고 악독함)한 욕심을 금하고 본래의 선한 본성을 회복해 성인이 되라는 명(命)이 깃들어 있다. 교육에 있어 음악을 중시했던 공자가 “‘시경’에 수록된 음악 300여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선비의 심성수양에 있어 사특한 욕심을 제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거문고는 악기로서의 의미를 넘어선 심성수양의 반려자이자 천지의 이치를 담고 있는 도 그 자체인 것이다.
선비들은 말한다. “학문이 넉넉해지면 벼슬을 해서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라.” 지금 저 산과 대선을 앞둔 세상이 소요스럽다. 그 소요스러움은 소요산의 단풍을 닮지 않았다. 단지 시끄럽고 어지러울 뿐이다. 학문이 넉넉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을 자식처럼 사랑하겠다고 목청을 돋우는 이들에게 사욕부터 버리라는 명이 담긴 거문고 한 벌을 권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