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13일] 카르노

프랑스가 위기를 맞았다.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한 유럽의 군주들이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왕당파 잔존세력도 꿈틀거렸다. 군대는 와해된 상태. 귀족의 망명과 처형으로 지휘관도 턱없이 모자랐다. 풍전등화의 프랑스를 구한 것은 마르세유 의용군도, 나폴레옹도 아니었다. ‘국민 총동원령’이라는 시스템이 프랑스를 지켜냈다. ‘국민 모두가 싸운다. 나이 든 남자는 무기와 마차를 만들고 여자는 병원에서 일한다. 공무원은 자리를 지키고 미혼 남자들은 맨 앞에서 싸운다’는 동원령을 마련한 사람은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 1753년 5월13일 태어난 카르노는 공병장교 출신의 국민의회 의원. 그가 고안하고 실행한 동원령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역사상 최초의 국민군인 80만명의 혁명군이 조직됐다. 카르노는 대병력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물론 봉화와 기구를 이용한 명령전달 체계를 구축했다. 나라 전체의 생필품 생산과 조달도 그의 책임이었다. 그를 근대적 국민경제 운용의 창시자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참여한 프랑스군은 국왕의 근위병과 용병이 주축인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카르노는 ‘행정의 귀재’ ‘승리의 조직자’라는 명망을 안았다.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발, 제네바에 잠시 망명했던 기간에는 미적분학과 기하학에 대한 저술도 펴냈다. 결국 나폴레옹에 의해 중용된 그는 워털루 전투 패배 뒤에도 최후 항전을 주장하다 왕정복고 후 추방돼 1823년 독일에서 생애를 마쳤다. 카르노의 이름을 더욱 빛낸 것은 후손. 아들 니콜라는 ‘열역학 제2법칙’의 근거인 ‘카르노 사이클’을 발견한 물리학자다. 1887년 제3공화정의 대통령에 당선돼 7년 후 외국인에게 암살된 손자 마리는 민초를 아꼈던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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