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금리. 은행에 맡겨도 이자 한푼 안주는, 유례를 찾기 힘든 기묘한(?) 금융 제도다. 캐리 트레이드. 이자가 싼 통화를 빌려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높은 통화나 주식 등 다른 자산에 투자, 이익을 챙기는 거래 방식을 말한다. 일반에게는 표현부터 다소 낮선 이 두 요인으로 인한 문제가 일본, 그리고 나아가 전 국제외환시장을 흔들어 대고 있다. 유로 대비 사상 최저, 달러에 대해선 32개월래 기록을 갈아치운 엔화 약세 기조가 우선 그렇다. 우리에겐 원ㆍ엔 환율 급락으로 인한 수출 경쟁력 약화가 큰 걱정이다. 이 기조로 갈 경우 달러 당 150엔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엔화 가치가 이처럼 연일 뚝뚝 떨어지는 원인은 달러 자체의 글로벌 강세 외 앞서의 두 요인이 종횡으로 엮어내는 결과다. 제로금리 정책을 일본이 공식 도입한 건 지난 2000년 경제 위기의 상황에서 경기 부양을 위한 일종의 비상 조치였다. 그 뒤 6년. 이제 피로감이 누적되고 제도 폐지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며 엔화의 세계 화폐로서의 경쟁력은 과거의 ‘영화’(榮華)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상황이다. 여기에 초저금리의 엔화를 빌려 유로화에 투자하는 이른바 엔-유로 캐리 트레이드가 엔화를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지난해까지만도 국제외환시장의 큰 흐름은 미국의 저금리를 이용한 달러 캐리트레이드에 좌지우지됐다. 그러던 게 올들어 미국의 금리 인상이 이어지고 종착점이 예상되던 일본의 제로금리 체제에 변화의 조짐이 없자 패턴이 급속히 바뀌고 있다. 통화의 지위를 좌우하는 것은 정치경제 군사 기술력 등 그 나라의 총체적 국력이다. 지금 국제외환시장의 엔화 위상-바로 국제 사회 내 일본의 오늘이다. ▦“빚이란 빌리기 전까지는 빌려주는 이가 큰소리 치지만 일단 빌리고 나면 빚 진 자가 큰 소리친다.” 아시아와 미국의 관계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얘기다. 아시아에 국채를 파는 형태로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미국이 통화 정책과 관련 아시아에 대고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푸념 섞인 소리다. 만의 하나 미국이 부채를 갚기 어렵다면 달러를 찍어서 건네주면 된다. 이른바 세뇨리지 효과, 바로 기축 통화국의 엄청난 특권이다. 일본이 기축통화의 지위를 넘보던 시절은 지난 1980년대. 일본 경제가 거침없이 진군하며 미국의 심장부 뉴욕 맨해튼의 건물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이던 바로 그 시절이다. 엔화를 달러와 맞설 기축 통화로 키운다는 야심은 그 후 ‘잃어버린 10년’의 혹독한 불황기를 겪으며 낯 뜨겁게 꺾였다. 그러나 엔의 세계 통화화를 향한 일본의 야심이 사라진 건 결코 아니다. 그런 면으로 보면 우경화로 치달으며 아시아 주변국들과 날로 등을 져 가는 고이즈미 총리의 외교는 일본 스스로의 국익을 위해서도 오판의 행보임이 틀림없다. 당장 통화측면으론 달러의 독주를 막고 엔화를 키우기 위해 주변국들로부터 협력을 끌어 내야 할 게 일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의 오늘을 상징해주는 엔화 추락. 그 위기감속 향후 통화 정책과 관련해 일본 조야는 지금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제로 금리 정책의 폐지 여부를 놓고 정부와 중앙은행이 정면 충돌하는 상황이 그걸 말해준다. 80년대 질풍 노도로 달려가며 일본은 지구촌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가고 ‘팍스 야포니카’(Pax Japonica)’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그 역전의 시점으로 찍었던 해가 바로 금년이다. 올해도 고이즈미는 ‘오기’로까지 비쳐지는 편협된 소신에 자기 암시를 하려는 듯 특유의 휘젓는 빠른 걸음 걸이를 해가며 국제사회를 상대로 좌충우돌 한해를 보냈다. 그 과장된 행동이 시사하는 바는 오늘 일본, 고이즈미 정권의 정서 불안이다. 그리고 불안정은 오늘 국제 금융시장내 과거의 위세로부터 추락해 흔들리는 엔화의 모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