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ㆍ4 남북 정상회담 합의와 10ㆍ3 북핵 6자회담 2단계 이행조치 서명을 계기로 부시 행정부의 대한반도정책이 변화하는 기류를 보이고 있다.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북핵 문제 해결의 진전 여부에 맞춰 이에 걸맞은 지원을 한다는 강ㆍ온 양면전략에서 좀더 유화적인 방향으로 부시 행정부의 방향이 전환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두 가지의 큰 기류를 활용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조치에 수용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북한을 세계 경제의 틀에 끌어들이려는 의사를 내비쳤다. 북한이 테러지원국에서 벗어나면 적성국교역법과 수출관리법 등 미국의 5개 법률 규제에서 벗어나 사실상 서방으로의 수출길이 열리게 된다. 특히 빈곤 퇴치 등 개도국 지원을 맡고 있는 세계은행(IBRD)과 같은 국제기구들로부터 차관 및 원조를 받을 수 있어 만성적인 경제난 해소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부시 행정부는 존 볼턴 유엔 주재 미국대사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이른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을 내치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차관보를 비롯한 대북 온건파를 대거 중용해 대북정책에 균형점을 모색해왔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0ㆍ3 북핵 6자회담 공동 합의문이 채택된 직후 3일(현지시간) 이례적으로 환영성명을 내놓았다. 이 정도의 사안이라면 미 국무부의 성명으로 족한 것이 전례였지만 부시 대통령이 직접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은 이례적이라는 게 워싱턴 정가의 평가다.
게다가 이번 합의문에는 미국이 그동안 줄기차게 강조해온 북한의 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에 대한 신고 여부가 적시되지 않았는데도 부시 대통령이 환영논평을 낸 점에서 더욱 그렇다. 부시 대통령은 성명에서 “이번 합의는 전면적이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라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추가적인 조치를 수렴하고 있다”며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6자회담 참가국들의 공통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게다가 부시 대통령은 라이스 국무장관과 힐 차관보 등 협상팀에 대한 노고를 치하는 하는 내용도 성명에 담아 대북 온건파에 힘을 잔뜩 실어줬다.
부시 대통령의 이 같은 태도는 잔여 임기 내에 북한 핵 문제에 대해 핵 불능화를 넘어 핵 폐기 및 한반도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로 가는 가시적 성과를 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가 임기 후반부에 보다 대북 문제에 유화적 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미국의 이 같은 대북정책의 변화 조짐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미국 정치 지형과 무관하지 않다. 이라크전쟁의 수렁에서 빠지면서 부시에 대한 지지도는 20%를 밑돌고 이라크 전비 예산안 처리도 민주당의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 이란 핵 문제도 꼬일 대로 꼬이고 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북핵 문제에 대한 가시적 성과를 통해 그동안의 대외정책 실패를 만회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분석하고 있다.
북한의 최대 숙원인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를 둘러싼 ‘이면합의설’이 제기되는 것도 부시 행정부가 대북정책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관측을 뒷받침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베이징 합의와 관련, 힐 차관보가 미국과 북한이 공개되지 않은 별도의 양해사항을 주고받았음을 시인했다고 전했다. 신문에 따르면 힐 차관보는 “북한이 핵 프로그램에 대해 이달 말까지 1차로 신고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양해사항 중 하나가 일본과 함께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에 대해 좀더 전향적으로 독려해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일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분명히 해제 일정이 담겨 있다”고 말해 이번 양해사항이 테러지원국 해제 시기를 담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에 힘을 싣고 있다.
테러지원국 해제 시기와 관련, 힐 차관보가 “4일부터 미 의회와 곧바로 해제에 대한 협의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고 10ㆍ3 합의에 따른 영변 핵시설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 종료일이 연말인 만큼 이르면 연내로 북한이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