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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경성의 '월스트리트'인 남대문로의 명치정에 투기 광풍이 불었다. 조선취인소가 투자자 보유 자금의 10배까지 매매를 허용하면서 일확천금을 노린 농민들이 대거 투기판에 몰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증권사 설립도 본격화됐다. 조선 최초 증권사인 경성증권이 1926년 명치정2정목에 세워진 데 이어 1933년에는 금익증권과 대원증권이 설립됐다. 그 이후 '주식왕' 조준호가 세운 동아증권이 1934년 문을 열었다. 1945년 동경 야마이치증권이 최초로 명치정2정목에 지점을 설립한 데 이어 1940년 오사카 노무라증권이 동양척식에 지점을 세우는 등 일본 증권사의 경성진출도 활발했다.
1938년 김귀현씨가 세운 명치증권도 당시 한 시대를 풍미한 증권회사 가운데 하나다. 김 씨는 합백(주식으로 망해 도박꾼으로 전락한 절치기꾼) 출신으로 증권사 사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유명했다. 김씨는 1936년 일본의 2ㆍ26사건 직전 쌀선물 매수에 투자해 인천미두장에서 큰 돈을 벌었다. 당시 벌어들인 돈으로 경성 최초의 미주겸영취인원(쌀과 주식 겸업자)인 명치증권을 설립했다.
설립 뒤 일간지에는 등대를 배경으로 '고객본위 진실제일'의 문구를 내세운 명치증권의 대형광고(사진)가 자주 실렸다. 김씨 본인의 실패 경험을 근간으로 개미 투자자들이 성공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등대가 되겠다는 게 광고 속 내용이다. 하지만 꿈은 결국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전쟁 발발을 예상하고 주식선물 매도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다가 일본의 철수로 주가가 폭등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에 따라 1년 만에 명치증권이 파산하면서 그는 '개미 투자자들의 등대가 되겠다'는 꿈을 접어야 했다.
명치증권과 그의 꿈은 사라졌다. 하지만 '개미 투자자에게 이끄는 등대로 수익이라는 결실을 안겨준다'는 정신은 증시 역사 내내 이어지고 있다. 다만 노력은 있으나 결실은 그리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 최근 국내 증시가 암흑기에 빠지면서 등대(증권사)의 불빛도 점차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는 이(투자자)도 늘고 있다. 증시 침체 상황, 진정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암흑(증시 침체기) 속에서 탈출(수익)의 길을 열어줄 빛(해법)이다. 그 빛을 찾아줄 곳은 등대(증권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