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돈을 더 풀어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요구에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양적완화 참여로 화답했다. 저인플레이션(low-inflation)에 시달리는 유로존의 경기를 다시금 불 지피겠다는 유럽 통화정책 수뇌부의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드라기 총재가 강세를 이어가는 유로화 환율을 "면밀히 감시할 것"이라고 밝혀 미국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으로 한동안 잠잠했던 글로벌 환율전쟁이 다시금 치열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커졌다.
드라기 총재는 3일(현지시간) 통화정책 후 기자회견에서 "유로존이 디플레이션에 빠질 특별한 위협은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며 과도한 디플레이션 우려에 경계를 표시했다. 3월31일 공개된 유로존 소비자물가지수(CPI)가 ECB 목표치인 2%에 턱없이 모자란 전년비 0.5% 상승에 그치면서 일부 전문가들은 기준금리 인하 등 ECB가 경기부양책을 내놓을 수 있다고 예측해왔다. 그러나 ECB는 이날 0.25%로 유지되고 있는 기준금리는 물론, 1년9개월째 '제로(0)'인 익일물 예금금리도 내리지 않았다.
대신 드라기는 유로존 저인플레이션을 뒤집을 수단으로 미국식 양적완화를 들고 나왔다. 앞서 매파로 분류되던 옌스 바이트만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 등이 양적완화에 긍정적 입장으로 선회하며 ECB가 양적완화를 실시할 수 있다는 시장의 기대가 커졌다.
드라기 총재는 "금리 등 아직 전통적 통화정책 수단이 남아 있다"며 양적완화 내용·일정에 대한 언급은 피했지만 "통화정책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양적완화 실시에 찬성했다"고 강조했다. 이는 유로존의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유로화 가치를 낮추는 공격적 돈 풀기를 실시하겠다는 단언으로 해석된다. 미국·일본의 양적완화에 지속적 강세를 이어온 유로화 가치는 지난 한 해 동안 달러 대비 7% 오른 상황이다.
한편 라가르드 IMF 총재는 전세계의 저성장 우려가 커졌다며 과감한 부양책을 주문했다. ECB의 양적완화 선언에 앞서 나온 그의 요구는 오는 11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리는 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를 앞두고 각국에 경기부양 공조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라가르드는 2일 "세계경제가 침체기의 코너를 돌아 회복기에 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리다"며 "충분한 정책적 동기부여가 없으면 중기적으로 몇 년간 세계경제가 '저성장의 함정'에 빠질 수준"이라고 말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전세계 경제가 앞으로 5년간 총 22%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하며 "이전 예상치에 비해 2%포인트 높지만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유로존을 지목해 "인플레이션 부진이 장기화하면서 내수와 생산이 위축되고 이것이 성장과 고용을 짓누르고 있다"며 이에 대처하기 위한 과감한 부양책을 주장했다. 또 "유로존이 '저인플레이션' 상태"이면서 "비전통적 수단까지 동원한 추가 완화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AP통신은 이날 라가르드의 발언에 대해 "ECB에 미국과 일본식 양적완화를 도입하라고 압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일본은행에 대해서도 현재 실시 중인 금융완화를 비롯한 적극적 경기부양책을 유지하도록 주문하며 "적극적 재정부양책과 공격적 성장전략 등 '아베노믹스'의 나머지 화살 두 개도 완벽히 발사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어 전세계 중앙은행들간 정책 소통의 강화도 주문했다. 그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테이퍼링의 충격이 경제 근간이 취약한 국가들뿐 아니라 결국에는 미국으로도 퍼질 것"이라며 "각국 통화당국 간에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신흥국 기업의 대출 증가로 불안정성 심화도 우려된다며 우크라이나 사태 등 전세계의 지정학적 긴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