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리빙 앤 조이]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소통의 부재 향기의 집착 그리고 연쇄 살인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다는 것은 영화감독에게 있어서 불리한 게임이다. 이미 책을 읽어서 그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에 소설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원작의 수많은 팬들은 한편으론 영화가 원작의 내용과 의미를 훼손하지 않나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감시한다. 사실 감독으로선 ‘잘해야 본전’인 상황이다. 전세계적으로 1,500만부가 팔린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연출한 톰 뤼크베어도 이런 불리함을 안고 시작했다. 그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가 찾아낸 방법은 ‘후각의 영상화’. 인간의 향기에 취해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자의 이야기인 만큼 원작은 향기에 대한 묘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감독은 원작의 이런 묘사를 서술 없이 오직 감각적 화면만으로 표현해 낸다. 실제 악취가 풍겨 나올 것 같이 느껴지는 시장 한켠의 시궁창, 아찔한 꽃 내음이 느껴지는 화사한 꽃밭, 상큼함이 느껴지는 과일 장수 아가씨의 손에 쥐어진 자두 하나 등 작은 이미지를 통해 관객들은 화면 속에 흐르는 향기를 맡는다. 스토리만 보아서는 원작과 크게 다른 길을 가지 않는 영화는 이렇게 후각을 이미지화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영화만의 독자적 생명력을 얻는다. 톰 뤼크베어 감독은 불리한 게임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배경은 18세기 프랑스. 빈민가 시장의 한켠의 진동하는 생선비린내 속에서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벤 위쇼)라는 아이가 천재적인 후각을 갖고 태어난다.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며 오직 냄새만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성인으로 자라난 장 바티스트. 그런 그가 어느날 길에서 우연히 자두 장사를 하던 한 친절한 여인의 체취를 맡는다. 그 체취에서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향기를 발견한 그는 그 향기에 취해 그녀를 따라가다가 그만 실수로 그녀를 죽이고 만다. 이후 그 여인의 향기를 잊지 못한 장 바티스트는 그때의 그 아름다웠던 향기를 향수 속에 담고자 결심하고 향수의 낙원이라 불리는 그라스로 떠난다. 그리고 이 곳에서 아름다운 처녀들을 죽인 후 그 고유한 체취를 뽑아 향수로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장 바티스트라는 인물은 인간과 마음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오직 향기로만 소통할 수 있었던 불행한 남자. 소통의 부재가 향기에 대한 집착으로, 그리고 연속된 살인으로 이어진 이 비극을 감독은 담담한 어조로 담아낸다. 대단한 액션이나 드라마는 없지만 옛날 이야기를 하듯 차분히 흘러가는 스토리 위에 주인공의 심리를 담아낸 연출은 관객을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때문에 2시간 30분 가까운 긴 영화지만 그다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600억원이 투입된 영화답게 비주얼도 화려하다. 18세기 유럽의 모습이 충실히 재현돼 있으며 이 배경 위에 기묘한 느낌의 스토리를 얻어낸 감독의 재주도 훌륭하다. 주인공 벤 위쇼의 연기는 눈 여겨 볼만하다. 엄청난 분량의 상영시간을 거의 혼자 힘으로 끌고 가는 역이지만 정작 그의 대사는 많지 않은 편. 대부분의 연기를 심리묘사와 표정연기로 대신 해야 한다는 뜻이다. 벤 위쇼는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그르누이라는 인물이 가진 불안함과 집착을 잘 표현해냄으로써 이 어려운 일을 해낸다. 뒤를 받치는 조역들의 연기도 볼만하다. 장 바티스트에게 향수제조법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출연한 더스틴 호프만과 장 바티스트에게 딸을 희생당하는 그라스의 귀족으로 출연하는 앨런 릭맨 등 노련한 배우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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