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8월7일,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제도의 작은 섬 라로이아. 길이 13.7m짜리 뗏목 하나가 섬에 닿았다. 페루에서 출항한 지 101일 만이다. 뗏목의 이름은 페루어로 태양신을 뜻하는 콘티키(Kon-Tiki).
콘티키호는 왜 6,980㎞에 이르는 바다를 건넜을까. 탐험대장이며 인류학자인 토르 헤위에르달(Thor Heyerdahlㆍ당시 32세)의 집념 때문이다. 노르웨이 태생으로 동물학을 공부한 그는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폴리네시아 이주설을 제기했으나 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자신의 이론을 실증하려고 옛 방식대로 뗏목을 만들어 태평양을 건너는 도전에 나섰다.
친지들은 모험을 말렸으나 그가 가볍고 단단한 발사나무 9개를 덩굴로 묶어 제작한 콘티키호는 파도를 헤쳐나갔다. 폭풍우 때는 하루 1만톤, 바다가 잔잔할 때도 200톤씩 바닷물이 뗏목을 덮치는 시련에서도 6명의 탐험대는 목적을 이뤘다.
일엽편주로 태평양을 건넌 탐험대에는 세계의 찬사가 쏟아졌다. 학계도 헤위에르달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971년 갈대로 만든 고대형 선박 ‘라 2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이집트 문명과 잉카 문명과의 연관성도 증명해냈다. 그의 연이은 항해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할 때는 실증이 뒤따라야 한다’는 불문율을 세우며 학문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도 헤위에르달 못지않은 모험가들이 있었다. 발해와 일본의 무역관계를 실증하기 위해 뗏목 ‘발해 1300호’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동해를 건너 일본에 도착하려던 탐사대원 4명은 1998년 1월 말 탐험 성공 직전 폭풍우를 만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차디찬 겨울바다에서 숨졌지만 과거를 통해 미래를 빛내려던 뜻은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