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 먼 한국 경제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가계부채에 또다시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 2ㆍ4분기 가계빚이 980조원으로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 연말이면 1,000조원도 가뿐하게 넘길 기세다.
규모도 심각하지만 들여다보면 내용도 좋지 않다. 부동산 투자와 상관없는 생활비 대출이 늘어나고 있는 반면 빚을 내 물건을 사는 판매신용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생활은 쪼들리고 소비심리는 극도로 위축됐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최근의 상황이 걱정이다. 정부는 대출을 일으켜서라도 부동산시장을 살리려 하지만 정작 집값 하락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하우스푸어만 늘면서 은행의 가계대출 건전성에 가뜩이나 적신호가 켜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면서 대출로 막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른바 '악성 가계빚'이 자꾸 늘고 있는 형국이다.
◇석달 만에 17조원 급증=22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ㆍ4분기 중 가계신용(잠정)'에 따르면 2ㆍ4분기 가계신용(가계대출+판매신용)은 전분기보다 16조9,000억원 증가한 980조원으로 집계됐다. 가계신용은 지난해 말 963조8,000억원으로 최고기록을 세운 뒤 1ㆍ4분기 963조1,000억원으로 주춤했다가 한 분기 만에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가계대출은 17조5,000억원 늘어난 926조7,000억원을 나타냈다. 가계대출 증가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6월에 종료된 취득세 감면정책이다. 세금혜택을 받기 위해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사람이 한시적으로 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예금은행의 가계대출 증가분(8조3,000억원)에서 주택담보대출 증가분(5조6,000억원)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생활비 빌리고 외상 줄이고=서민층이 주로 이용하는 비은행 금융회사의 가계대출은 은행과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 비은행예금취급기관 대출 증가분(3조1,000억원)의 대부분(2조8,000억원)은 마이너스대출 등 생계형 대출 성격이 컸다. 업권별로는 구조조정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저축은행(3,000억원 감소)을 제외하고 신용협동조합(3,000억원), 상호금융(2조1,000억원), 새마을금고(9,000억원) 등에서 대출 증가세를 보였다.
소비위축에 따른 판매신용 감소도 눈에 띄었다. 2ㆍ4분기 판매신용은 6,000억원 감소한 53조3,000억원이었다. 지난해 10월 신용카드 발급 및 이용한도 합리화 대책 이후 신용등급 7등급 이하의 경우 카드를 발급 받기가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신용카드사(-5,000억원)가 판매신용 감소세를 주도했다. 여기에 내수침체로 할부시장의 85%, 리스시장의 60%를 차지하는 자동차판매가 급감하면서 할부금융회사도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비은행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린 사람도 제대로 못 갚고 있다. 강도 높은 연체관리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업계의 올 상반기 연체율은 조금씩 들썩거렸다. 삼성카드는 6월 말 연체율이 1.82%로 전년 말(1.68%)보다 0.14%포인트 올랐고 국민카드(2.11%), 하나SK카드(2.92%) 등도 상승했다. 6월 시중은행 가계대출 연체율은 0.86%로 낮아졌지만 이는 반기 연체관리에 따른 일시적 효과로 분석된다.
◇가계빚 1,000조원 시대 열리나=전문가들은 올 하반기 가계대출이 1,000조원을 무난히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기본적으로 가을 이사철과 연말효과를 무시할 수 없는데다 당장 정부가 전세대출 한도를 2억6,600만원까지 대폭 확대하면서 전세대출이 무섭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의 전세대출 총액은 지난달 말 25조8,000억원으로 올 들어서만 2조4,000억원 증가했다. 정부가 28일 부동산대책을 통해 취득세 영구인하 등 주택거래를 살리는 내용을 발표하면 주택대출 증가에 속도가 더 붙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경기가 여전히 가라앉아 있고 향후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에 따라 금리인상이 진행될 경우 가계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높아진 비은행 금융회사의 가계부채 문제를 연착륙시킬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부동산 문제 해법으로 금융시장 기능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른바 '풍선효과'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신용카드 자격기준을 강화한 탓에 카드시장에서 밀려난 저신용자들이 최근 국민행복기금 등 정책금융으로 옮겨 타는 분위기"라며 "정부 정책을 역이용한 모럴해저드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