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58.자매출판사 ‘능인’ 설립하다

출판은 현재의 산업이면서도 미래의 변화를 앞당겨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미래 산업이다. 변화하는 사회를 뒤따라가며 변화의 모습을 하나하나 주워 담는 것도 출판의 역할이지만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 미리 알아서 앞장서야 하는 데 출판의 묘미가 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는 더욱 빠른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세계도 그렇지만 어린이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한 해가 다르게 크게 바뀌어 갔다. 그것은 텔레비전과 애니메이션, 전자오락, 컴퓨터의 보급과 궤를 같이했다. 아동도서의 내용과 편집 역시 이러한 변화의 모습에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이 생각하고 오랜 시간 열중해서 읽어야 하는 도서는 서서히 퇴조하고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그러면서도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어린이 독서의 취향이 바뀌고 있었다. 예림당의 경우 80년대 중반에 펴낸 `이야기극장`과 80년대 후반에 펴낸 `무지개극장` 시리즈를 통해 이러한 변화에 적응했지만 그런 책만으로 90년대의 어린이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어린이들의 독서 호흡이 갈수록 짧아지는 만큼 보다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이해하기 쉬운 책을 만들어야 했다. 이에 우리 회사가 착안한 것은 만화였다. 만화는 재미있고 설득력이 강하다. 아무리 딱딱하고 어려운 내용이라도 이 형식을 빌면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일단 흥미도 커지고 이해하기도 쉬워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지않아 일본처럼 만화가 서점에 버젓이 진열되어 판매되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도 자명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만화에 대한 일반 인식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폭력과 섹스 등 소재에 구애 받지 않는 일본 만화들이 불법 복제되어 오랫동안 우리의 만화시장을 석권하면서 만화는 건전하지 못한 부도덕한 것으로 취급돼 왔다. 이 때문에 만화는 시중 서점에 얼굴을 내밀지 못한 채 어둑한 대본소 그늘 아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동도서 전문출판사로 널리 알려진 예림당 이름에서 섣불리 만화책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만화 시대가 곧 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1991년 12월 예림당 자회사로 `도서출판 능인`을 설립했다. 예림당은 그 동안 해왔던 것처럼 그림책과 아동문학, 과학 등 지식과 정서개발을 위한 일반적인 도서를 펴내고 `능인`에서는 만화 등 보다 흥미위주의,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책을 내기로 한 것이다. 내용을 담아내는 틀에 따라 출판을 이원화 시키자 출판 내용이 훨씬 자유롭고 다양해졌다. 특히 능인에서는 만화에 대한 우려와 일반적인 인식의 틀을 깨고 `교양학습만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속담이며 한문숙어 등 학습과 연계한 만화는 물론 우리의 고전소설인 춘향전, 사씨남정기, 옹고집전, 인현왕후전, 허생전, 금오신화, 구운몽 등과 세계명작소설도 만화로 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아무리 우리 고전을 읽으라고 해도 학생들은 숙제 삼아 겨우 한두 권 읽을 뿐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풍토를 충분히 감안하여 코믹한 요소와 만화적 발상을 대폭 가미했다. `우리고전` 시리즈는 출간 즉시 큰 호응을 얻어 중쇄를 거듭했으며 이후 초중고 교과과정에서 언급되는 웬만한 작품들은 거의 시리즈에 넣었다. 시험을 위해 내용도 모르는 채 고전의 이름과 작가명을 달달 외기만 하던 아이들이 자진해서 고전만화를 찾아 읽게 된 것이다. 만화로 희화 시키면서 내용이 다소 왜곡된 면이 없지 않지만 그 줄거리와 주제를 전하는 데는 충분했다. 능인에서 학습만화를 전격 출시하자 서점에서는 처음에는 꺼리는 듯했지만 그런 인식은 잠깐이었을 뿐 이후 아동도서 출판사들의 학습만화 개발에 도화선이 되었으며 현재는 학습만화야말로 출판사나 서점들의 주요 매출원이 되다시피 했다.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ㆍ예림 경기식물원이사장ㆍ전(前)대한출판문화협회장 <나춘호 예림당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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