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대학교수 된 건 이민생활 설움 덕분

박지관 빅토리아 웰링턴대 교수<br>뉴질랜드 이민 17년 만에 포기않는 적극적 태도로 학과장·치안판사직 따내

"맨손에 말그대로 몸뚱이 하나 믿고 뉴질랜드에 들어가 밑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민생활의 설움이 나를 지금의 대학교수ㆍ치안판사로 키웠습니다."

지난 2일 개막된 '2013 세계 한인 차세대대회' 참석 차 방한한 박지관(44·사진) 뉴질랜드 빅토리아 웰링턴대 정보경영학과 학과장. 그는 1996년 27세의 나이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뉴질랜드에 이민해 17년 만에 학과장이자 웰링턴 지역 유일의 한인 치안판사, 뉴질랜드 한글학교 재단 이사장이 됐다.


그가 뉴질랜드로 간 것은 한국생활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 학벌도 좋지 않고 돈도 없는데다 너무 치열한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껴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외국에 가서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던 것.

하지만 연고 없는 이역만리 타국생활이 녹록할 리 없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주차장으로 쓰던 창고를 개조해 살면서 학교에 다녔다. 14인치 TV의 포장박스가 식탁이었고 신문지가 식탁보였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면서도 돈이 없어 컴퓨터를 사지 못해 학교 연구실에서 문 닫는 시간까지 공부하기 일쑤였다.

그는 "많은 이민자들이 남의 나라라고 주눅이 들어 쉽게 포기를 한다"며 "하지만 당장 실패에 실망하지 말고 길게 보며 노력하다 보면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민 4년 만인 2000년 뉴질랜드 총리가 뉴질랜드 북부지역 학생 중 학업 성과가 우수할 뿐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 수여하는 '골 세터 어워드(Goal Setter Awards)'를 받았다.


"지원을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마감 전날에야 결심하고 급하게 지원서를 써서 제출했는데 어떻게 상을 받게 됐어요. 한번 해볼까 말까 고민할 때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제 인생을 바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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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직책 대부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지원해 따낸 것이다. 5년 넘게 활동 중인 치안판사직도 직접 구의원을 찾아가는 등 발로 뛰고 필기시험과 인터뷰를 거쳐 임명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 학과장 자리도 원래는 파트타임직이던 것을 학교에 건의해 풀타임으로 만들었다.

아직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올해로 네 번째 1년에 30명을 뽑는 국제로터리클럽의 피스 펠로십에도 도전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적극성이 이민생활에서 느낀 설움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학교 연구실에서 일할 때 한 교수가 영어도 못하고 늘 주눅이 들어 있던 그를 대놓고 무시해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 그런 설움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영어를 공부하고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저를 도와주시는 분을 많이 만났다"며 "어느 정도 먹고살 정도가 되면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뉴질랜드 한글학교 재단은 지난달 10일 공식 출범했다. 정부로부터 인증을 받아 공식적인 기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아내가 한글학교 교감이고 딸은 한글학교 학생이라는 그는 "25년여의 역사를 자랑하는 뉴질랜드 한글학교지만 여러 지역에서 각자 운영을 해온 탓에 지원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었다"며 "재단 출범을 계기로 조직이 재정비되고 많은 분이 관심을 가지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앞으로 그의 목표는 1.5세, 2세와 뉴질랜드 주류사회, 한국과 뉴질랜드를 잇는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 제게 도움을 청했을 때 도움을 주고 싶다"며 "한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뉴질랜드 땅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간다면 정말 보람찰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박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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