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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SectionName(); [2010 신년기획] 경제 이끌었던 '정론 50년' 한국號 고속 성장 동반자 ■ 시대를 이끌어온 특종·기획서울경제 50년 희망의 100년 반세기 빛낸 특종과 외부필진IMF구제금융 신청 앞당기고 한발 앞선 기후변화시리즈정책 교과서 역할 톡톡 (왼쪽부터) 조 순, 변형윤, 남덕우, 이헌재, 강만수, 폴 새뮤얼슨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신문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모이면 흐름을 변화시킨다. 서울경제가 정론지로 자리잡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람에 있다. 안으로는 소수정예의 인력이 심층기사와 기획시리즈로 깊이를 자랑하면서도 언제 터질 수 모르는 특종기사를 발굴하고 밖에서 공급되는 외부 기고가 서울경제를 정론지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특히 개발 시대에 서울경제에 기고했던 30대 관료, 금융인들이 총리와 부총리, 장관, 한은 총재, 은행장에 오르고 무명의 직장인이 '경제 칼럼'을 통해 이름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 외부필진 구성에 있어서도 한쪽에 기울지 않았다는 점이 칼럼을 빛내준 요인으로도 꼽힌다. 반세기를 이어오는 동안 서울경제는 수많은 특종을 통해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 경제를 살찌우며 경제정책의 흐름을 바꿔왔다. 깊고 정확한 분석 기사와 함께 지면을 빛내고 자유시장 질서를 지켜왔다. 일본측이 한일어업협상에서 어획량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 국익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기사다. 1966년 9월2일자에 실린 이 기사는 일본의 실태보고서에 의문을 제기했다. 일본은 1966년 4~6월 동안 공동규제수역에서 한국과 일본보다 두배 가량의 어획량을 올렸다며 자료를 들이밀었으나 서울경제는 설비와 기술이 앞서는 일본측이 고의적으로 어획량을 줄였을 가능성을 캐들어갔다. 결국 한국은 서울경제의 기사를 무기 삼아 일본을 압박해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냈다. 서울경제의 특종이 어민들의 재산을 지켜준 셈이다. 지난 1977년 7월1일 도입된 부가가치세의 당초 예정 세율은 13%. 새로운 세목의 신설에 대한 상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부가가치세 도입을 강행하되 세율은 10%로 낮춘다는 박정희 대통령 주재 관계장관회의 내용을 입수, 특종 보도로 내보냈다. 상인들은 13%가 10%로 낮춰질 예정이라는 기사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세목 신설이 영업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상인들의 우려는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태로 국제유가가 급등한 시기와 맞물려 국내경기 위축으로 이어졌다. 등장하는 인물이 무려 3,000명에 이르는 대형 기획시리즈. 1년 4개월 동안 63회가 나가는 게재되는 동안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렀다. 50대 재벌그룹의 창업과정과 혼맥, 가계를 심층 분석한 이 시리즈는 철저한 현장취재와 재벌가에 대한 객관적 조명을 위해 각 부의 기자들이 대거 동원된 이 시리즈의 취재를 위해 기자들이 뗀 주민등록등초본만 1,000통이 넘었다. 요즘까지도 '재계 혼맥의 바이블'로 통하는 이 시리즈는 도서 부자 시리즈의 원전이기도 하다. 구 소련과 수교하는 대가로 정부가 3년 동안 30억 달러 규모의 경협차관을 지원한다는 기사를 90년 10월22일자로 내보냈다. 우리 정부는 물론 소련 정보기관까지 기밀 유출자 색출에 나섰으나 서울경제 기자가 불이익을 받더라도 취재원을 밝힌 수 없다며 끝내 입을 닫았다는 정보기관들을 애타게 만들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이 기사에 대노하는 바람에 청와대와 외교부 담당직원들이 줄줄이 안기부에 줄줄이 끌려가 곤혹을 치렀다. 당시 빌려준 차관은 아직 완전히 돌려 받지 못한 상태다. 여당인 민자당이 서울 송파구가락동 정치교육원부지를 ㈜한양에 매각할 방침이라고 1992년 4월15일자로 보도한 특종. 민자당의 대권후보 경선이 과열되어 있던 시점이어서 보도는 특혜대출과 정치자금 수수설 등 정치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담당한 기자는 영역인 국회와 민자당 뿐 아니라 업계와 은행도 취재에 포함시켜 액수까지 파악해내며 대어를 낚았다. 민자당은 훗날 이 돈으로 총선을 치러 특혜 대출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라는 논란을 낳았다.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 신청을 한사코 부인하던 정부가 서울시내 호텔에서 IMF 고위인사를 만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울시내 유명 호텔을 뒤진 끝에 얻어낸 개가. 오랜 잠입 취재와 기다림 끝에 취재팀은 국내 유명 금융인이 IMF 부총재와 극비리에 만나는 장면을 포착했을 뿐 아니라 사진에도 담았다. 취재기자와 사진기자가 동시에 특종을 잡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정부는 서울경제 특종이 나간 다음날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특종이 정부 결정을 앞당긴 셈이다. 코스닥 등록기업인 L사가 3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3시간 짜리 초단기로 빌리면서 거액의 외자를 유치하는 것 처럼 투자자를 현혹하는 수법을 끈질기게 추적해 밝혀낸 특종. 단순한 보도자료에 의문을 갖고 3개월 이상 추적한 결과 올린 개가다. 사실이 확인된 후 구성된 특별취재팀이 자금의 흐름과 주식의 거래, 주가 변동을 종합적으로 취재해 무려 5개면에 달하는 특종기사를 2002년 10월29일 게제한 시장의 전문가들도 놀랄 만큼의 깊이를 보여준 기사다. 해당 업체는 서울경제를 명예훼손으로 걸어 거액의 소송을 냈으나 비리가 계속 드러나자 소를 자진 취하했다. 2007년 가을부터 2008년 초까지 3달여 동안 기후변화협약의 현황과 미래, 전망은 물론 신기술 동향과 외국 각국 입장을 현지 취재로 전달한 기획 시리즈. '경제지 기획 시리즈의 진면목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담당 관료들은 물론 기업인들이 국제 기후변화의 협약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폐해가 갈수록 커지고 협약에 대한 각국의 입장이 조금씩 변하는 데다 우리나라가 그린 성장을 추구하고 있어 아직도 기사를 구해보는 독자가 많다. 새뮤얼슨·조순 교수등 총수·석학 함께 참여 지면신뢰도 높여 서울경제와 함께 성장한 필진 외부 필진은 다른 어떤 매체도 흉내낼 수 없는 서울경제만의 자랑이다. 서울경제가 정간 당하는 날까지 실렸던 '재계 회고'의 외부 기고자는 모두 58명. 이들 중 38명이 전직 장관, 7명이 은행의 총재나 은행장이다. 나머지 13명은 이병철 삼성회장을 비롯한 재벌 총수들이다. 재벌 총수들이 쓰는 '재계 회고'가 나갈 때는 그룹사 임직원은 물론 관계회사까지 신문을 구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써야 하는 재벌 총수들이 서울경제 기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 품질과 위상, 신뢰도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젊은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던 '경제 교실' 필자를 살펴보면 인재의 각축장처럼 느껴진다. 30~40대에 경제교실 필진으로 필명을 날린 이현재 당시 서울대 교수는 국무총리까지 올랐다. 조순 교수는 한국은행 총재와 서울시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진보 성향의 서울대 변형윤 교수와 민족경제론을 지은 고 박현채(당시 홍익대 강사)도 필진으로 활약했다는 점은 경제교실의 필진의 구성범위가 넓으며 실력 위주로 짜여졌다는 점을 대신 말해준다. 이경식(당시 기획원 과장), 남덕우ㆍ이승윤(서강대 교수) 등도 필진으로 활약하다 부총리까지 올랐다. 이 부총리는 훗날 한은 총재까지 지냈고, 김건 당시 한은 차장도 총재를 역임했다. 경제부처 과장급 관료 필진 중에서는 이규성ㆍ이헌재ㆍ홍재형 당시 재무부 과장과 나웅배 서울대 교수 등도 돌고 돌았지만 경제 부총리까지 올라갔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특보인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도 과장 시절 유려한 필체를 지닌 필진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순 교수는 서울경제와 인연이 깊어 월례 경제토론회의 사회 또는 토론자로 가장 많이 참석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명박 대통령도 월례 경제토론회를 경험했다. 30대 중반에 현대건설 사장에 오른 셀러리맨의 신화이던 당시 이명박 사장은 사장 3년차이던 1979년 6월21일 '긴축ㆍ안정 기조하의 수출산업의 진로'를 주제로 열린 제 42회 월례 경제토론회에서 장성환 코트라 사장, 이석희 대우실업 사장, 이갑섭 성균관대 대학원장 등과 함께 토론을 벌였다. 외부 필진은 아니지만 서울경제 '경제논문 현상공모'를 통해 처음 이름을 알린 유명인사도 적지 않다. 한국은행, 외환은행 거쳐 기업인으로 변신, 재벌그룹 회장에 올랐던 고나무 전 대상그룹 회장과 장승우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서울경제 경제논문 현상 공모'에서 당선된 사람들이다. 참여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역임한 이백만 목포대 교수는 경제논문 현상공모에 당선돼 서울경제와 인연을 맺고 훗날 기자로 입사해 서울경제와 한국일보의 경제부장를 지낸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한 시대에 이처럼 많은 재벌총수나 고위공무원 출신, 기업인, 소장 학자와 엘리트 공무원들이 특정 언론사에 외부 기고자와 토론자 등으로 활동한 경우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신문의 질이 독보적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정책 엘리트, 성취자들이 여론을 형성하고 이끌어가는 공간으로서 서울경제가 존재하고 국민경제와 함께 성장했기에 인재가 많이 몰렸던 것으로 풀이된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