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차려입고 촬영하는 것도 순간이죠. 집에 오면 설거지부터 해요. 여배우가 곧 김희애의 전부라 착각하면 그 때부터 삶이 피곤해지는 것 같아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집에서 설거지하는 것도 온전히 제 모습은 아니죠. 시소 타듯 밸런스(균형)를 맞춰가며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아'하게 앉아 '품격'있게 와인 한 잔 곁들이는 것이 일상일 것 같은 배우 김희애(47)도 촬영 후 집에 돌아가면 수북이 쌓인 설거지 앞에 한숨부터 나오는 영락없는 주부가 된다. 나이를 비켜가는 빼어난 외모, 정확하고 깊이 있는 연기, 동시에 억척 엄마는 아니지만 슬하에 두 자녀(2남)를 키우고 남편을 내조하며 따뜻한 가정까지 꾸려나가고 있는 건 "특별할 것 없이 무던히"지나온 시간에서 비롯됐다는 게 그의 수줍은 고백이다.
4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의 한 호텔. 엄마·아내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101번째 프로포즈'(1993) 이후 21년 만에 스크린 나들이에 나선 그를 만났다. 오는 13일 개봉을 앞둔 영화 '우아한 거짓말'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 두 아들을 둔 그에게도 조금은 남다른 작품이다. 영화는 학교 내 '집단 따돌림'(왕따)이란 아픈 소재를 통해 가족들 사이에 잊었던 사랑을 절절하게 그려낸다. '완득이'의 김려령 작가와 이한 감독이 다시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이다. 영화는 일명'카따'(문자메시지를 이용한 따돌림)를 비롯해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이뤄지고 있는 집단 따돌림 사례를 사실적으로 그린다. 민감한 소재를 다뤘지만, 영화는 이내 소통·관심·이해가 필요한 뭇 사람들의 어깨를 살포시 토닥거리고 마음을 보듬는다. 원작 소설과 시나리오를 접한 김희애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며 "마음 아프고 피하고 싶은 얘기였지만, 나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완득이' 때도 그랬고, 소재 자체만 보면 어둡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부분을 강조하며 밝은 느낌으로 담아내는 이한 감독의 연출력을 믿었다"고 했다.
그는 이 영화에 이어 종합편성채널 JTBC의 새 월화드라마'밀회'로 시청자를 찾는다. 19살의 나이를 뛰어넘어 배우 유아인(28)과 호흡을 맞춰 감성적인 멜로 연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배우의 결혼은 은퇴로 들어서는 길목이자, 복귀해도 맡는 배역이 엄마 역할에 그치는 등 운신의 폭이 넓지 못하기도 했다. 김희애는 보이지 않지만 은연 중 드리워진 그 그늘을 과감히 벗어 던지며 40대 배우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 몇 안 되는 배우이기도 하다.
"(tVN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를 보면서 선생님들(이순재·신구·박건형·백일섭)의 존재감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 느꼈고 덩달아 제 기분도 좋아지더군요. 감독, 배우 모두 젊은 사람들 위주로 흘러가면 기형적인 환경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저도 (연기자) 후배들을 위해서 또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중년층을 위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보여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